뮤지컬 배우들에게 ‘렌트’는 꿈의 무대다. 남경주, 최정원, 조승우, 전수경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거쳐갔다. 이건명, 김선영, 정선아, 김호영, 최재림은 ‘렌트’를 통해 스타로 성장했다. 올해 한국 공연 20주년 무대에서도 스타가 탄생했다. 23명 뽑는데 1,300명 몰린 오디션을 뚫고 록 뮤지션 로저 역을 따낸 배우 장지후(32)다.
‘렌트’는 에이즈 공포, 소수자 혐오에 맞선 가난한 예술가들 이야기다. 그 가운데 로저는 에이즈로 연인을 잃고 그 자신도 에이즈를 앓으면서 사랑 자체를 냉소하는, 반항하는 청춘이다. 남자 배우라면 도전하고픈 캐릭터다. 최근 서울 신도림동 디큐브아트센터에서 만난 장지후는 “‘렌트’ 20년 역사에 내 이름을 새길 수 있어 영광스럽다”고 말했다.
장지후는 훤칠한 키, 다부진 체격, 선 굵은 연기, 중저음 목소리로 최근 대학로에서 주목받는 배우다. 살짝 반항기까지 갖췄다. “최종 오디션 때 ‘지금 너의 노래를 방해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았어요. 제가 답했죠.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당신들’이라고.” 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원래 다른 배역에 지원한 그에게 앤디 세뇨르 연출은 로저 역을 맡겼다.
‘렌트’와의 만남은 가슴 깊이 감춰둔 상처와 마주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연습 때 배우들은 손을 마주잡은 채 주제곡 ‘시즌스 오브 러브(Seasons of Love)’를 불러주고 싶은 사람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저마다 여러 얼굴을 떠올렸다. 함께하는 배우들은 더 단단해졌다.
무대엔 그 시간, 그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커튼콜 때 배우들이 유독 많이 우는 이유다. 장지후도 매번 눈이 빨개진다. 장지후는 가스, 전기가 끊길 정도로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얘기했다. 스무살부터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다. 뮤지컬 배우의 꿈도 무대 설치 아르바이트를 하다 품게 됐다. “무대 뒤에서 늘 궁금했어요. 관객의 환호를 정면에서 마주하면 어떤 기분일까. 벼락처럼 꿈이 생겼어요.”
작은 극단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어깨 너머로 연기를 배웠다. 연기학원에선 그의 형편을 알고 수강료를 받지 않았다. 대학 입학금도 학원장의 제자였던 배우 권상우가 마련해 줬다. 장지후의 꿈은, 이 과정을 함께한 모든 이들의 꿈이기도 했다.
데뷔작은 2010년 군 복무 당시 출연한 국방부 뮤지컬 ‘생명의 항해’. 대학 졸업 후엔 돈 벌러 호주로 잠시 떠나기도 했지만, 결국 2016년 뮤지컬 ‘금강 1894’로 무대에 돌아왔다. ‘호프’ ‘킹아더’ ‘노트르담 드 파리’ ‘마마 돈 크라이’ 등 출연작도 꽤 쌓였다.
장지후에게 무대란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아픈 과거와 화해하는 법을 배워가는 곳”이다. 그래서 ‘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뿐’이라는 ‘렌트’의 노랫말이 더욱 절실하다. ‘내일이 진짜 없다면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에도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극장으로 달려가 공연을 해야죠. 아마 ‘렌트’ 배우들 모두가 그럴 거예요. 사랑하는 동료들과 무대에서 마지막을 불태우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