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을 관통한 ‘바람의 가문’과 ‘끝판왕’의 만남

입력
2020.08.03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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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후, 오승환 상대 9년 전 이종범 무안타 설욕

한 시대를 풍미한 ‘끝판왕’ 오승환(38ㆍ삼성)은 지난 6월 9일 KBO리그에 복귀하면서 가장 상대하고 싶은 타자 중 한 명으로 이정후(22ㆍ키움)를 꼽았다. 이정후는 ‘바람의 아들’ 이종범(전 LG 코치)의 2세로 프로 데뷔 4년 만에 리그를 대표하는 간판으로 우뚝 선 선수다.

오승환과 이정후의 투타 대결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다. 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부자가 대를 이어 한 명의 ‘특급 투수’를 상대하는 특별한 매치업이다. 야구 팬들에겐 흥미로운 스토리다. 오승환 역시 “어리지만 실력이나 성적으로 입증한 선수가 이정후”라며 “힘 대 힘으로 붙어보고 싶다”고 맞대결을 기대했다.

이정후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최고의 마무리 투수였고, 해외에서도 잘했기 때문에 항상 멋있는 존재였다”고 설레는 감정을 드러냈다. 다만 이정후는 “이름을 거론해준 건 영광스럽지만 투수 이름을 보면 주눅들 수 있기 때문에 우투수, 좌투수라는 생각만 하고 타석에 들어가겠다”고 승부욕을 보였다.

한 세대를 관통한 대결은 오승환 복귀 후 두 달여 만인 2일 대구 키움-삼성전에서 마침내 성사됐다. 9회초 삼성 마운드에 오른 오승환이 10회초에도 등판했고, 키움은 2사 후 김하성, 에디슨 러셀의 연속 안타로 이정후가 타석에 섰다.

‘바람의 가문’이 ‘끝판왕’을 맞닥뜨린 건 이종범의 현역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1년 이후 9년 만이다. 현역 시절 오승환에게 타율 0.294(17타수 5안타)를 기록한 이종범은 2011시즌엔 2타수 무안타로 침묵했다. 2017년 1군에 데뷔한 이정후는 2013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외 리그(일본프로야구ㆍ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한 오승환을 상대해 본적이 없었다.

아버지에 이어 오승환을 마주한 이정후는 공격적인 승부에 3구째까지 0B-2S로 불리한 카운트에 몰렸다. 하지만 4, 5구 연속 볼을 골라 2B-2S로 만들었다. 이후 오승환이 5구째 시속 145㎞ 직구를 스트라이크존 한복판에 꽂자 힘차게 방망이를 돌려 우중간으로 타구를 보냈다. 삼성 우익수 구자욱이 타구를 보고 따라갔지만 전진 수비를 펼쳤던 탓에 처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2-2로 팽팽히 맞선 가운데 팀의 4-2 승리를 이끄는 결정적인 한방이자, 2010년 아버지 이종범 이후 10년 만에 오승환에게 뽑아낸 ‘바람의 가문’의 안타다. 반면 일격을 당한 오승환은 허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정후는 “대선배와 야구장에서 맞붙을 수 있게 돼 신기했다”며 “승부는 승부이기 때문에 타석에 들어갔을 때는 오승환 선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우투수가 던진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다.

김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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