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 난 정직하게 달렸다'

입력
2020.08.0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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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과 제시 오언스(8.3)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은 일장기 말소사건 등으로 귀국 과정서 사상범 취급을 받고 '메달을 반납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겐 양정고보 시절부터 그를 도운 이들이 있었고, 나라 잃은 백성의 응원이 있었다. 그는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조선저축은행에서 일했고, 여운형의 건국동맹을 도우며 광복을 맞이했고, 정부 수립 이후 대한체육회, 육상경기연맹, 올림픽 조직위와 아시안게임 한국대표단장 등을 맡았다.

1936년 8월 3일 육상 100m 금메달을 차지한 제시 오언스는 멀리뛰기와 200m, 400m 계주까지 트랙과 필드 4관왕을 차지했지만 가난과 차별, 조롱을 견뎌야 했다. 히틀러가 그를 홀대했다는 이야기가 과장되게 퍼진 것과 달리 독일서 그의 인기는 꽤 뜨거워, 몸에 검은 흙을 바르고 달리기하는 아이들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하지만 귀국 후 그는 히틀러의 악수를 외면했다는 설에 대해 "제의를 받은 적도 없다"며 "백악관 루스벨트의 초대 역시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뉴욕 환영회에 참석하러 가면서도 버스 흑인 좌석에 앉아야 했고, 호텔선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흑인을 광고 모델로 써준 데는 없었다. 그는 클리블랜드 빈민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주급 30달러의 육상 코치로, 한 세탁업체 사장이 운영하던 농구팀 밴드로, 공장 문지기로, 주유소 주유원으로 일했다. 그렇게 일하며 어렵사리 대학을 마쳤고, 아내와 딸을 부양했다.

그는 아마추어 선수들에게 10~20야드씩 접어주고 달리는 '쇼'에도 출전했고, 모터바이크, 승용차, 트럭, 심지어 쿠바 아바나의 거세마 경주대회에서 말과도 시합을 벌였다. 그런 그를 '부끄럽지도 않으냐'며 조롱한 이들이 있었다. 그는 "어쩌란 말이냐? 금메달이 밥을 먹여 주지는 않는다"고, "적어도 정직한 삶이었다. 나는 먹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의 형편은 1949년 시카고에서 PR회사를 차려 운영하며 조금씩 펴이기 시작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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