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객실에 누가 먼저 들어갈래?"
상대는 '마피아'였다. 여차하면 총격전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였다. 당시 서울로 급파된 경찰은 모두 7명, 권총에 실탄까지 장전하고 있었지만 누가 하나 선뜻 선봉에 나서지 못했다. 결국 당시 팀장을 맡고 있던 안재경 형사과장이 제일 먼저 객실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놈들이 총을 뺀다 싶으면 내가 소리를 지르면서 창밖으로 뛰어내릴게. 그때 일시에 들어와서 다 해치워버려."
당시 호텔 객실은 4층이었지만 다행히 호텔 화단에 3층 높이까지 자란 소나무가 여러 그루 심겨 있었다. 몸을 던진 후 나뭇가지를 부여잡을 심산이었다.
"후배들이 요즘도 '단신으로 마피아와 맞장뜨려고 덤벼든 대한민국 형사는 형님밖에 없을 것'이라면서 엄지를 치켜세웁니다. 객실에 들어서던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립니다."
다행히 총격전은 없었다. 범인들은 위조지폐를 유통하는 마피아 조직원이 아니라 카메룬 출신의 국제 사기꾼들이었다. 몇억을 들고 오면 몇 배의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으로 사업가들을 유인하는 중이었다. 안 과장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이 첩보를 접하고는 곧장 형사들을 데리고 서울까지 올라갔다. 그는 1998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 30여년 경찰 생활을 하면서 겪은 일 중에서 가장 아찔했던 경험이라고 밝혔다.
'형사지존'. 그의 사무실 벽에 걸려 있는 편액에 담긴 글귀다. 동료가 직접 써서 전달했다. 경찰 내 그에 대한 평가가 저 한 마디에 모두 담겼다. 1989년 2월 18일 순경으로 시작해 지역에서 최단 기간 기록인 9년만에 경위를 달았다. 광역수사대와 지능수사대, 마약수사대 3개 대를 모두 거치면서 수사와 형사 모두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베스트형사를 12회나 차지했다. 늘 혁혁한 성과를 내면서 같은 팀 부하 직원들을 승진시켜 ‘승진제조기’라는 별칭도 얻었다. 대구 지역에서 ‘형사들의 롤모델’ 하면 대부분 안 과장을 첫손에 꼽는 이유다.
"축구죠."
성공의 비결을 묻는 말에 돌아온 답이다. "팀장을 맡은 뒤로 팀워크와 체력 모두 축구를 통해 다졌다"고 덧붙였다.
처음엔 그냥 축구가 좋았다고 했다. 어찌 보면 집안 내력이었다. 총경으로 퇴직한 외삼촌이 '축구광'이었다. 축구팀을 창단할 때도 외삼촌에게 지원금을 받았다. 처음 경찰에 입문할 즈음만 해도 그의 축구 열정은 그리 각광받지 못했다. 파출소장이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축구 연습을 하는 그를 보고는 "이 더운 날씨에 저게 무슨 짓이냐. 새로 온 순경이 미쳤다"고 말했다.
"제가 공을 차니까 선배들이 혀를 차더군요. 그때 속으로 생각했죠. 경위만 달자. 경위 달면 경찰서 안에 반드시 축구팀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죠."
결심한 대로 경위를 단 이후에 경찰축구팀을 만들었다. 그것도 외삼촌에게 후원금을 받아서 유니폼, 축구화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조건으로 모았다. 그러나 일단 팀이 만들어지자 인원이 급속도로 불었다. 한때는 100명을 넘길 때도 있었다. 고등학교 운동장을 빌려서 연습했다. 한달에 한번씩 포항스틸러스구단에서 연습을 했고, 서너달에 한번씩 부산, 광주 등에 원정을 갔다. 99년엔 서귀포경찰서장과 함께 전국 경찰 축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당시 지역 경찰관 24명의 비행기 티켓 구매와 2박3일 숙박과 식사에 드는 비용의 80%를 안 과장이 사비로 충당했다.
축구팀이 활성화되자 과장, 서장들이 그를 경계하기도 했다. "따르는 후배들이 많아서 총경보다 힘이 더 좋다"는 소문이 난 까닭이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안 과장은 "운동장에 가면 내가 서장이었다"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사 발령에까지 영향을 미쳤을 정도"라고 말했다.
공만 열심히 찬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축구 한다고 업무 소홀히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일은 더 열심히 했다. 신입 때부터 그랬다. 경찰학교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으면서 외삼촌에게 특별과외를 받았다. 안 과장은 "당시만 해도 형법 각론 등 법률 지식도 없이 그저 윽박질러 자백만 받으려는 선배들이 많았다"면서 "그런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외삼촌에게 부탁해서 법 공부도 하고 조사하는 법도 배웠다"고 밝혔다. 그렇게 실습을 해서 수업에 들어가자 교관이 "경력이 몇 년 이상 되는 것 같다"고 놀라워했다. 조사 서류를 잘 꾸며 파출소에서 경찰서로 스카우트되기도 했다.
승진시험에도 악착같이 매달렸다. 2년 만에 경장을, 4년 만에 경사를 달았다. 그리고 9년 만에 경위 시험에 합격했다. 당시만 해도 90%는 경사로 퇴직하던 시절이었다. 안 과장은 "업무를 업무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면서 "간부가 되어서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정식 절차대로 수사를 진행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승진시험에 매진했다"고 고백했다.
10년 동안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 휴가도 모두 포기했다. 축구 외에는 취미 생활도 없었다. "업무 안 하고 승진시험에만 목을 맨다"는 소리가 나올까봐 코피를 몇 번이나 흘릴 정도로 일에도 매진했다. 다행히 선배들이 인정해줬다. "일에도 안 빠지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축구에 미쳤단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어느새 친한 척하는 선배들까지 생겼다.
안 과장은 "축구를 통해 건강과 사람 모두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팀워크에 관한 한 축구 이상의 특효약이 없었다고 했다.
"경찰에 입문해서 보니 형사들이 너무 따로 놀더군요. 중요한 첩보가 있어도 입 꾹 다물고 혼자만 알고 있는 경우도 많더라구요. 특진 때문이었죠. 형사들끼리의 갈등이 너무도 심했습니다."
축구장에서 안 과장의 별명은 '안팅크'였다. 그의 지휘 아래 손발을 맞추었다. 전략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개인 플레이는 허용될 수 없었다. 그렇게 의견을 조율하고 함께 호흡하면서 팀워크가 형성됐다.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대로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역할을 맡기고, 잘 못 차는 사람은 서운하지 않게 10분이라도 교체해서 뛰게 해주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축구팀에서 뛰는 사람들은 불만이 없었고, 팀원들과도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2006년에는 고향 구미 선산에 있는 고향집에 2,000여만원을 들여 야간 경기가 가능한 족구장을 만들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부하, 동료들과 함께 고향집에 가서 풋살과 족구를 즐기며 팀웍을 다졌다.
한달에 한번 1박2일로 축구 캠핑을 한 것도 팀워크를 위해서였다. 포항 월포 해수욕장 인근에 시골집을 구매해 숙소로 썼다. 그렇게 축구하고 먹고 놀면서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서 원수라고 해도 될 지경이 된 경우에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합방이었다.
"너희 둘은 오늘 한 방에서 자!"
그렇게 한 방에 집어넣으면 처음엔 범처럼 으르렁거리다가 결국 화해를 하게 된다. 안 과장은 "열이면 열, 효과가 없었던 적이 없다"고 귀띔했다.
축구를 통한 소통과 리더십이 대구 전체에 알려진 계기가 있었다. 2005년 무렵, 안 과장이 팀원들을 잘 이끈다는 소문이 나자 당시 형사과장이 각 서에서 실적이 안 좋기로 소문난 사람들을 모아서 그에게 맡겼다.
"제가 계급은 높았지만 저보다 나이가 많은 팀원들도 있었습니다. 밥 숟가락으로 밥을 떠줘도 입 벌리기 싫어서 굶는 사람들로 구성된 팀을 보고 있자니 처음 며칠 동안은 잠이 안 왔습니다. 눈을 감으나 뜨나 앞이 깜깜하긴 마찬가지였죠, 하하!"
안 과장은 역발상으로 접근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가 아니라 '열심히 놀던 당신 더 놀아라'는 식이었다. 그는 "몇 달은 무작정 놀기로 작정했다"고 고백했다. 틈만 나면 족구에다 매일 회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과장이 주재하는 팀장 회의에 나가면 8개 팀 중에서 매일 꼴찌였다.
"우리 일 안 합니까?"
2달을 꼬박 놀기만 하자 팀원들 사이에서 드디어 일 이야기가 나왔다. 안 과장은 못 들은 척했다.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렇게 2~3개월을 더 신선놀음을 하자 "그만 놀고 일 좀 합시다"는 직원들의 목소리에 화기까지 느껴지더라고 했다. 그때서야 안 과장은 일을 ‘허락’했다.
"실적 그래프가 비아그라를 먹었나?"
일을 시작하자 기세가 무서울 정도였다. 바닥을 기던 실적 그래프가 천장을 뚫을 듯 솟구쳤다. 2등인 팀과도 3~4배 가까이 격차가 벌어졌다. 그래프를 잘못 그렸다고 생각한 팀장도 있었다.
비결은 축구 전술이었다. 몇 달 동안 회식을 거듭하면서 팀원들의 장점을 하나씩 발굴했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일을 맡겼다. 자기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팀원들은 말 그대로 날아다녔다.
"팀원 한명은 아무리 찾아도 특기가 없더라구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운전을 잘하더군요. 좋아하기도 하고. 그 친구한테 무조건 운전을 맡겼어요. 그랬더니 본인도 좋아하고 다른 팀원들도 차에서 쉴 수 있으니 너무 흡족해하더라구요. 우리팀 승합차가 붕붕 날아다닌 비결이었습니다."
성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팀원들이 더 신이 나서 일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잡은 지명수배자나 절도범을 수차례나 잡았다. 의욕이 넘치다 보니 거리를 다니는 사람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심히 살핀 결과였다.
성과가 나오면 반드시 보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범인 검거에 성공하면 휴가를 줘서 쉬게 해줬고, 결정적인 역할을 한 팀원들은 승진 등의 열매를 맛볼 수 있도록 적극 배려했다. 안 과장은 "휴가와 승진은 득점 세리머니"라면서 "골을 넣은 기쁨을 만끽할 수 없다면 선수들의 마음에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런 리더십 더분에 여기저기서 "형님 같이 일 합시다"하는 청탁이 끊이지 않았다.
현장 중심주의도 성과를 내는데 큰 몫을 차지했다. 축구계에는 "축구에서 100% 승리하는 비법은 해설가들이 뛰도록 하는 것"이라는 농담이 있다. 해설가들이 현장을 모르고 말만 많다는 비아냥이 담겨 있다. 안 과장은 경찰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소위 '앉은뱅이 수사'다. 사무실에 앉아서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저런 지시를 내리다 보니 수사가 산으로 가거나 핵심을 놓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는 설명이다. 안 과장은 "보통 사건이 터지면 사무실에서 아침과 저녁에 2번 회의를 하는데, 나는 사무실을 폐쇄했다"면서 "아침에 바로 현장에 출근해서 하루 10번 이상 현장 회의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형사과장이 현장에 없으면 팀장들끼리는 조율이 힘이 듭니다. 과장이 중재하고 결정을 내려줘야 일이 바로바로 진행됩니다. 축구도 120% 작전을 짜고 나와도 그라운드에서 뜻밖의 변수가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감독이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여가면서 선수들을 독려하고 지휘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축구와 수사의 공통점입니다."
현장에서 소통한 덕에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었다. 경찰에 몸을 담은 지 30년, 그 사이 강산이 3번 변했다. 안 과장은 "10년에 한번씩 수사 기법 등에서 큰 변화가 있더라"면서 "새로운 세대와 늘 소통한 덕에 그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과거에는 발로 뛰는 것이 전부였다면 2010년대 이후에는 IT 기기를 잘 다루는 형사가 성과를 올리더군요. 경력이 아무리 오래되고 경험이 풍부해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 과장은 기술적으로 발전한 수사 환경을 보면서 옛 생각에 잠길 때가 많다고 했다. 2005년 미제로 남을 뻔했던 내연남 토막살해 사건이 그렇다. 범인은 남자를 살해해서 시신을 유기하고 그가 몰던 차를 전혀 엉뚱한 곳에 주차를 해놓았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범인의 집에 들어가서 루미놀 테스트로 시약으로 혈흔을 발견한 후에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검거 당시 범인은 자살을 하기 위해 극약을 사서 한적한 곳으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안 과장은 "요즘 같으면 CCTV만 뒤져도 몇 시간 안에 윤곽이 잡혔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현장에서 뛰는 팀원들이 정말 고생했습니다. 일일이 확인하고 발로 쫓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거든요."
2006년 지역 유지들을 접근해 한달에 10억씩 털어내던 사기도박단을 비롯해 2004년에 검거한 문화재를 훔쳐서 경북 청도에 있는 저수지에 수장시킨 후 복역 후 팔아먹는 패턴을 보였던 절도단, 2007년의 전국 최대 규모의 유사석유 사범, 2009년 50여명으로 구성된 전국 규모의 가짜 쓰레기봉투 제작 사범, 2010년에 등장한 송유관 절도단, 2015년 100억대 인터넷 도박판 벌인 대구와 광주 조직폭력배 등을 잡아들일 때도 고생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함께 풍잔노숙하다시피 했던 후배들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죽어도 잊지 못할 사건"이 있다고 했다. 바로 2008년 5월30일에 발생한 허은정 어린이 납치 살해 사건이다. 그날 새벽, 정체불명의 남자 두 명이 허양의 집에 들이닥쳐 잠을 자고 있던 허양의 할아버지를 때렸다. 남자들은 소리를 듣고 옆방에서 달려와 이를 말리던 11살 허양을 납치해서 살해했다.
"그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오죠. 범인을 잡겠다는 생각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못하면 후배들이 반드시 해낼 거라고 확신합니다."
2018년 경찰에 입문한 안버금 순경은 그가 가장 기대를 걸고 있는 후배다. 안 과장의 아들이다. 아버지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도록 틈틈이 당시 사건을 언급하고 잡힐 듯 잡히지 않던 범인의 윤곽을 설명해준다고 했다.
"저는 11살에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어려서 삶에 관해선 아버지와 아무런 교감이 없었습니다. 이제 아들과 어떤 공통된 화제와 목표를 가진다는 것 자체가 꿈만 같고 행복합니다. 2대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있어 안심하고 현직을 떠납니다."
6월30일에 현직을 떠난 안 과장은 퇴직 후 일주일 만에 '명예범죄수사연구관'으로 위촉됐다. 앞으로 대구경찰청 교육센터에서 외래 강사로 후배들에게 범인추적기법, 형사 절차상 적법절차 준수 방안 등을 강의한다.
"저는 32년 동안 출근하기 싫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습니다. 퇴직했지만 명예범죄수사관으로 후배들을 꾸준히 만나면서 든든한 조언자로, 또 형님 같은 축구 동료로 오래도록 후배들에게 헌신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