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미가 28일 미사일지침 개정에 합의하면서 고체연료를 활용한 우주 발사체 연구ㆍ개발, 생산, 보유의 길이 열렸다. 우주 개발의 발목을 잡아온 족쇄가 40여년 만에 풀렸고 민간 우주산업 도약의 기반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또 중ㆍ장거리 미사일 기술 개발과 군사 정찰위성 등 최첨단 군사자산 획득을 통한 안보역량 강화 기회도 얻었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이날 브리핑을 통해 “오늘부터 우주 발사체에 대한 고체연료 사용 제한을 완전히 해제한다”며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 소식을 전했다. 김 차장은 "20세기 자동차ㆍ조선 산업이 한 국가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듯이 우주발사체 산업은 21세기 우리 미래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에 개정된 미사일 지침은 군사용 탄도미사일ㆍ군사용 순항미사일ㆍ우주 발사체 등 3개 분야 가운데 액체연료 사용만 허용해 온 우주 발사체 분야다. 김 차장은 “대한민국의 모든 기업과 연구소, 대한민국 국적의 모든 개인은 액체연료뿐 아니라 고체연료와 하이브리드형 등 다양한 형태의 우주 발사체를 아무 제한 없이 자유롭게 연구ㆍ개발하고 생산, 보유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청와대는 미사일 지침 개정으로 군 정보ㆍ감시ㆍ정찰 능력의 비약적 발전을 기대하고 있다. 당장 독자 기술로 군사 정찰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게 되면서 상공에서 한반도를 24시간 감시하는 일명 ‘언블링킹 아이(깜박이지 않는 눈)’ 구축이 가능해졌다. 우선 250∼300㎞ 상공에 띄워 세밀한 정보를 정확히 판독할 수 있도록 하는 저궤도 정찰위성 발사에 속도가 붙을지 주목된다. 김 차장은 “계획대로 2020년대 중ㆍ후반까지 저궤도 군사정찰 위성을 다수 발사하면 이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및 보다 안전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 구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ㆍ장거리 미사일 개발의 토대가 마련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번 미사일 지침 개정은 우주 발사체에 한정 됐지만, 여건이 허락할 경우 군사용으로 전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군은 이미 고체연료를 사용한 현무-2A(사거리 300㎞), 현무-2B(500㎞), 현무-2C(800㎞) 탄도미사일을 개발해 전력화했다. 최근 개발에 성공한 탄두 중량 2톤의 ‘괴물 미사일’ 현무-4도 고체연료로 알려졌다.
미사일 지침 때문에 사거리는 800㎞ 이하로 묶여 있지만 관련 기술력을 고도화할 수 있게 됐다. 김 차장은 탄도미사일 사거리 제한과 관련해서도 “안보상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미국측과 협의 가능하다”며 “결국 ‘in due time’(늦지 않게, 제 때)에 해결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간기업과 개인이 우주산업에 진출할 수 있는 길도 더 넓어졌다. 고체연료 사용 제한으로 우주발사체 개발에 제약을 받아온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액체연료는 발사체를 부식시킬 우려가 있고, 주입에 시간이 너무 걸리는 데다, 비용도 고체연료의 10배에 달한다. 김 차장이 액체연료 발사체를 통한 위성 발사를 “자장면 한 그릇을 10톤 트럭에 실어 배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빗댄 이유다.
류성엽 21세기군사연구소 전문연구위원은 “2017년 탄두중량 제한을 풀 때 사실상 (군사용으론) 모든 제한이 풀린 것이었는데, 이번에 고체 연료 사용제한을 푼 것은 기업, 연구소, 개인의 고체연료 활용 연구개발 장벽을 거의 다 해소해 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청와대는 특히 이번 지침 개정으로 “한국판 스페이스엑스(Space X)가 현실이 될 수 있다”며 우주산업 발전 촉진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우주개발에 대한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점에 한국 정부와 민간 기업도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차장은 “우주 데이터 활용, 발사체 개발 등에서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구축될 수 있다”며 “민간기업과 개인, 우주산업에 진출하기를 열망하는 젊은 인재들을 우주로 이끄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특히 “한국판 뉴딜이 우주로 확장되는 길이 열린 것”이라며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발전을 위한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IT 발전을 위한 인터넷 고속도로를 건설했다면 문 대통령은 4차 산업을 위한 우주 고속도로를 개척하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한미 미사일 지침 개정은 청와대와 백악관의 9개월간 톱다운 방식 협상의 결과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0월 청와대 국가안보실에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를 상대로 관련 문제 해결을 지시했고, 이때부터 청와대와 백악관의 직접 협상이 이어졌다. 이달 초 스티브 비건 미 국무부 부장관 겸 대북특별대표가 방한했을 때도 미사일지침 개정 문제를 논의했다고 한다. 김 차장은 “미국 NSC 상대방과 지난해 10월과 11월에 협상했고, 6차례 전화 통화를 했으며,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대사와도 만나 지속적으로 협상했다”며 “한미관계를 업그레이드한다는 것으로, 미사일지침 개정도 그런 틀에서 이어졌다”고 말했다.
미국은 그간 군사적 전용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우주 발사체에 고체연료 사용을 제한해왔다. 때문에 미국이 우리나라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개발을 허용한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류성엽 연구위원은 “군사 측면에서 고체연료를 활용한 장거리 미사일 개발 길을 터 준 것으로도 볼 수 있다”며 “비공식적인 ICBM 개발 승인이나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D) 구축을 위해 미사일 제약을 풀어줬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번 지침 개정이 방위비분담금 협상(SMA)과 연동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김 차장은 “SMA에 대해서는 아직 협상 중이라 드릴 말씀이 없다”면서도 “(미국에) 반대급부를 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저는 협상할 때 반대급부 같은 것은 주지 않는다”며 두 사안이 연계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