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인종차별의 음악

입력
2020.07.2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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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앙코르, 지인의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느낀 어쩌지 못한 감정이었다. 음악회를 산뜻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곡은 드뷔시가 작곡한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였다. 프로그램 후반부에 연주했던 인상파 대곡의 맥락을 이어가면서 연주 효과도 쌈빡하게 발휘할 수 있는 영리한 선곡이었다. 그렇게 영리했지만 한편으론 씁쓸했다. 악상은 마냥 유쾌해도 서러운 차별의 상징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드뷔시 첫딸의 이름은 클로드 엠마였다. 자신(클로드)과 부인(엠마)의 이름을 모두 붙인 것도 모자라 슈슈란 애칭으로도 즐겨 불렀다. 영락없는 딸 바보 드뷔시는 세 살짜리 슈슈를 위해 ‘어린이 차지(Children’s Corner)’라는 곡을 작곡한다.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이 얼마나 각별했던지 슈슈의 애착인형이었던 아기 코끼리를 악보의 표지에 직접 디자인할 정도였다. 동심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다정함은 천진난만하고도 순진무구한 악상으로 만발한다. 6곡으로 이뤄진 이 모음곡에서 마지막 곡인 '골리워그의 케이크워크'는 연주효과가 좋아 피아니스트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다. 지인이 앙코르로 선택한 바로 그 곡이다.

골리워그는 흑인을 흉내 낸 헝겊 인형이다. 영국의 동화작가 플로렌스 업튼이 창조한 캐릭터로 새까만 얼굴에 봉두난발의 머리카락이 특징이다. 똥그란 눈동자와 두꺼운 입술이 자아내는 표정은 까만 머리통 덕택에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절로 과장한다. 작가는 골리워그의 옆에 백합처럼 새하얀 소녀인형들을 동행시켜 우아함과 기괴함, 흑과 백을 대비시켰다.

이 흑인 헝겊인형에 드뷔시는 케이크워크라는 춤을 입혔다. 얼굴을 흑칠로 범벅인 백인 배우들이 흑인 노예를 흉내 내며 추던 춤으로 당시 파리의 카바레를 주름 잡고 있었다. 익살맞은 몸짓에 탬버린을 두들기며 만드는 야성적인 리듬은 파리 관객들을 매혹시켰다. 이 무대는 신문의 삽화로도 등장했는데 말풍선의 설명이 충격적이다. ‘원숭이와 뒤엉켜 춤추는 유쾌한 검둥이들’ 백인의 우월성을 온정적 태도로 암암리에 드러냈던 것이다.

드뷔시의 케이크워크는 미국 남부에서 유행했던 래그타임 리듬을 뿌리로 삼는다. 피아니스트의 왼손이 쿵작쿵작 2박의 규칙적인 리듬을 박동시키는 동안 오른손은 당김음과 불규칙한 악센트로 자연스러운 흐름을 흐트러트리며 청중의 혼을 빼놓는다. 여린박에 긴 음가로 강세를 주며 청중의 맥박을 고조시키는 당김음(syncopation)은 그 어원부터 실신(syncope)과 연결된다. 당시 파리의 청중들이 케이크워크를 ‘간질 댄스’라 이죽거린 걸 상기하면 경쾌한 리듬조차 야속해진다.

흑인 헝겊인형이 춤추는 케이크워크. 세 살짜리 딸을 위해 작곡했던 드뷔시의 이 곡을 두고 그의 동료였던 비평가 루이 라로아는 "아이들이 검둥이 춤을 어설프게 흉내 내다 타락할까 두렵다"며 비꼬았었다. 그러므로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려는 작곡가 애초의 의도, 혹은 서양음악과 흑인음악의 훌륭한 결합이라는 음악적 평가와는 별도로 이 작품은 인종차별의 함의를 경계해야할지 모른다. 온정적인 태도로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작곡가의 악의가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무감각했을 것이다. 제한된 정보는 이국의 문화를 왜곡하며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기 십상이다. 후대의 음악가들도 그 무감각을 무심히 이어가고 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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