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도체 소재 기업들이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돼 있는 게 눈에 보입니다."
좀처럼 보기 드문 경우라고 했다. 확실한 수요처를 잃고 당황하는 일본 소재 기업들의 최근 근황이다. 지난 해 7월 한국을 상대로 단행된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조치가 1년 넘게 이어지면서 파생된 현지 기업들의 변화상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본 기업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밖으로 티를 잘 안내는 데 우리나라 사람 앞에선 더 그런 경향이 있다"며 이렇게 전했다. 반도체 업계에서만 30년 넘게 종사해 온 이 관계자는 "그랬던 일본 기업인들이 요즘엔 '한국 기업에 공급하는 물량이 줄어서 죽겠다'는 하소연을 자주 한다"며 "그 만큼 불안해 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한ㆍ일간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양국 기업 사이에서도 미묘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특히 수출 규제 강화에 따른 유ㆍ무형적인 피해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대한해협을 건너와 직접 한국에 둥지를 트는 일본 기업들도 속속 포착되고 있다. 일본 정부에서 만든 무역 장벽이 오히려 자국 산업의 '탈(脫)일본화'를 부추기는 '부메랑'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28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일본 도쿄오카공업(TOK)은 인천 송도에 있는 공장에서 얼마 전부터 극자외선(EUV) 포토레지스트 생산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만든 EUV 포토레지스트는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 공정 적용 테스트가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TOK는 일본에서 만든 EUV 포토레지스트를 삼성전자에 납품해왔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한국 생산을 시작한 것이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공정에서 빛을 인식하는 감광재로 삼성전자의 차세대 EUV 반도체 공정에 투입되는 필수 소재다. 현재 EUV 포토레지스트 시장은 JSR(일본합성고무의 후신)ㆍ신에쓰ㆍTOK 등 일본 기업이 세계시장의 9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1년 전 일본의 수출규제 3대 품목에 포함되면서 국내 기업들이 소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 품목이다. 다만 EUV 공정을 통한 반도체 제작은 현재 삼성전자와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 정도만 가능해 공급사 입장에서도 특정 고객사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는 건 아킬레스건이다. TOK가 삼성전자에 공급하는 물량이 줄어들수록 실적 악화 또한 피할 수 없단 얘기다. 결국 삼성전자와 굳건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TOK는 자국 정부의 수출규제 기조에도 한국에서 EUV 포토레지스트를 직접 생산하는 결단을 내렸다. 미국 화학소재 기업 듀폰이 내년까지 2,800만달러(325억원)를 투자해 충남 천안에 EUV 포토레지스트 생산 시설을 구축할 계획이란 점도 고려됐을 것이란 해석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OK의 이번 결정에 삼성전자를 놓칠 수 있다는 절박함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칸토덴카공업도 얼마 전부터 반도체용 특수가스인 황화카르보닐을 천안 공장에서 만들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황화카르보닐 역시 지금까지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던 소재다. 반도체용 필름인 솔더레지스트의 전 세계 점유율 1위 회사 다이요홀딩스는 지난 5월 충남 당진에 생산 공장을 신축하겠다고 발표했다. 반도체 장치용 석영 유리를 제조하는 토소도 내년 양산을 목표로 관련 제조 시설을 충북 오창에 설립할 방침이다. 세계 3위 반도체 장비 업체 도쿄일렉트론(TEL)은 올해 초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공장이 위치한 경기도 평택에 기술지원센터를 마련했다.
반도체 소재 분야 외에도 한국행에 관심을 보이는 일본 기업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는 일본의 화학소재 기업들을 대상으로 지난 달 말, 온라인 투자설명회를 열었는데 자국 수출규제가 한창 진행 중인 데도 240개 기업이 참가했다. 2년 전 일본 도쿄에서 진행했던 투자설명회 당시 참가기업(120개)의 두 배였다. 코트라 관계자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일본 기업들이 큰 관심을 나타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 기회에 일본 기업들의 국내 유치가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규제 장벽 등을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일본의 많은 소재 업체가 한국 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환경과 안전, 고용과 관련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일본 기업들이 빨리 들어올 수 있는 환경을 우리가 조성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