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너무하네" 무심코 던진 말도 성폭력 '2차 가해'

입력
2020.07.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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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주는 말하면서도 문제 못 느껴
최근엔 진영논리 따른 피해가 심각
단순 의견표명은 표현의 자유 영역
개념과 범위 규정 사회적 합의 필요

"공(功)은 생각하지 않고, 피해자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성폭력 사건이 터지면 일상에서 '별 생각 없이' 지인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피해자에겐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 때로는 비수가 되어 피해자를 두 번 죽일 수도 있다. 불특정 다수가 보거나 들었다면 법적으로 문제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이를 인식조차 못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성폭력 사건 자체는 가해자와 피해자만의 문제지만, '2차 가해'는 모든 사람이 당사자가 될 수 있다. 피해자를 괴롭히고 상처내는 언행을 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문제라고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2차 가해란 정확히 무엇일까.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가 2차 가해로 분류되는 걸까. 정도가 심하면 법적 처벌까지 받을 수 있다는데, 그렇다면 피해자에 대해선 어떤 말도 하면 안 되는 걸까. 여성계와 법률 전문가 취재를 통해 2차 가해에 대한 개념과 범위를 정리해봤다.


2차 피해의 대표적 유형은

'2차 가해'는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2차 피해'가 된다. 학계와 법조계, 언론에서 많이 언급되다 보니 얼핏 정립된 개념 같지만, 미투 운동이 비교적 늦게 시작된 국내에서는 '2차 가해'라는 용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느 범위까지 해당하는지 사회적 합의가 부족한 실정이다. 법률전문가들은 대체로 "'명예훼손'이나 '모욕' 등 형법상 혐의가 인정되는 언행"이라고 좁게 해석한다. "피해자나 신고자를 집단적으로 괴롭히거나 신체 또는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행위를 금지해야 한다"고 정한 남녀고용평등법을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회사 내 고용관계에서만 적용되는 법이라 확대 해석에 한계가 있다.

2차 피해의 개념을 가장 먼저 구체적으로 언급한 곳은 사법부다. 2018년 4월 대법원은 “피해자가 성희롱 사실을 알리고 문제 삼는 과정에서 오히려 부정적 반응이나 여론, 불이익한 처우 또는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 등에 노출되는 일”을 2차 피해로 정의했다.

대법원은 2차 피해가 빈발하는 이유에 대해 "우리 사회의 가해자 중심적인 문화와 인식, 그리고 구조에서 기인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는 사건이 알려진 뒤 제3자들이 던지는 부당한 비난의 화살에 고통을 느끼기도 하고, 고발을 주저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압력과 사회적 분위기에 짓눌려 절망하기도 한다.

특히 피해자가 소극적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2차 피해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으로 피해를 당한 후에도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있고, 피해사실을 즉시 신고하지 못하다가 다른 피해자 등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한 것을 계기로 비로소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사실을 신고한 뒤에도 수사기관이나 법원에서 진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2차 피해 유형은 2018년 12월 제정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구체적으로 소개됐다. △수사나 재판, 보호, 진료, 언론보도 등 여성폭력 사건처리와 회복의 모든 과정에서 입는 정신적ㆍ신체적ㆍ경제적 피해 △집단 따돌림이나 폭행ㆍ폭언, 그 밖에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행위로 인한 정신적ㆍ신체적 손상을 가져오는 행위 △피해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사용자로부터 입은 불이익한 인사조치나 직무에 대한 부당한 감사와 그 결과를 공개하는 행위 등이 '2차 피해'에 해당한다.

주목할 부분은 판례와 법률에서 ‘2차 가해’가 아닌 ‘2차 피해’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2차 가해’란 용어는 형법상 폭력 혐의인 ‘가해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돼, 발언자가 의견 표명만으로도 처벌받을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반면 '2차 피해'는 피해자 입장에서 느끼는 고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피해자를 향한 부정적인 언사 또는 가해자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말은 명예훼손이나 모욕에 해당돼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있지만, 2차 피해라고 부르는 대부분의 언행은 도덕적 비난 대상”이라고 지적했다. 법적 처벌 여부에만 초점을 맞추면, 2차 피해의 범위가 지나치게 협소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 vs 엄연한 2차 피해

그렇다면 피해자 입장에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2차 가해가 되는 것일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사례처럼 유명인사가 가해자로 지목될 경우, 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마련이다. 법조인이나 정치인, 언론인 등이 "나는 피해자 말을 못 믿겠다"는 취지로 단순히 의견을 표명했다면, 이는 형사처벌 대상이 될 수 없다. 반면 "피해자가 꽃뱀이네"와 같은 모욕적 언사를 하거나 “피해자가 몇 년전에도 누굴 상대로 돈을 뜯어낸 적이 있다”는 식으로 허위사실을 퍼뜨렸다면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문제는 명예훼손이나 모욕죄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피해자를 향한 도를 넘는 비난이 많기 때문에, 2차 피해를 판단하는 명확한 기준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장다혜 위원은 "2차 피해의 개념이 표현의 자유를 억제할 만큼 과도하게 확장되면 그 사건에 대해선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서혜진 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도 “2차 가해라는 용어가 통용되고 있지만 2차 가해로 명명된 사례 중 법적 처벌대상에 해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의견은 누구나 표명할 수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를 표현의 자유로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여성가족부가 2018년 마련한 '직장 내 성희롱ㆍ성폭력 사건 처리 매뉴얼'에선 동료 등 조직 구성원들이 사건에 대해 무심코 내뱉는 말이 2차 피해를 낳는다고 규정했다. 피해자 신원이나 사건내용, 사건과 무관한 사생활을 주변에 알리거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유포하는 행위를 비롯해 피해자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는 일, 외모나 품행을 문제 삼으며 비난하고 대응 태도를 평가하는 일이 주요 2차 피해 사례다. 또 사건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하며 가해자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취하거나, 피해사실을 섣부르게 판단하는 행위도 피해자에게 정신적 피해를 입히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 밖에 △가해자를 옹호하거나 두둔하는 행위 △피해자를 비난하거나 의심하는 행위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거나 화해ㆍ합의를 종용하는 행위 △가해자 지지 여론, 피해자 비난 여론을 조성하고 조직 내 지지자 그룹을 만드는 행위 등이 피해자를 힘들게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인권 감수성이 바닥인 상황에서, 진영논리가 강화된 현실도 2차 피해가 줄어들지 않는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가해자를 지지하는 쪽에선 자신의 말이 피해자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 크게 개의치 않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비난을 여과없이 표출한다는 것이다. 장다혜 위원은 "진영논리에 따른 2차 가해는 앞으로 발생하는 모든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가 제1원칙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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