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안 죽였다" 다중인격 오가던 여고생, 마침내 구역질하며...

입력
2020.07.2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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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의 첨병, 프로파일러의 세계]  <1> 인천 초등생 살인 사건


편집자주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초능력자'처럼 등장해 범죄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프로파일러. 그러나 실제 프로파일러는 끊임없이 범죄자 심리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범행의 이유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한국일보는 범죄 현장 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프로파일러님, 와보셔야겠는데요.”

2017년 3월 29일 저녁 인천경찰청 소속 이진숙 프로파일러(경위)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인천 연수구 한 아파트 옥상에서 초등학생의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됐다는 내용이었다. 당일 체포된 용의자가 횡설수설할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니, 면담을 해달라는 요청과 함께였다.

용의자는 피해자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고교 자퇴생 김모(당시 17)양. 수사관들이 이 프로파일러에게 건네 준 사건 기록을 보니, 김양이 낮 12시50분쯤 실종신고된 A(당시 8)양을 데리고 자기 집에 들어가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를 통해 확인됐다. 김양은 3시간 만인 오후 4시 9분쯤 아파트에서 홀로 빠져 나왔다. 경찰은 이 시간 동안 김양이 A양을 살해한 뒤 시신을 흉기로 훼손해 아파트 옥상과 쓰레기장에 유기하고, 시신 일부는 비닐봉투에 담아 당일 오후 만난 박모(당시 19)양에게 건넨 것으로 추정했다.


만들어진 캐릭터 ‘A’와 ‘ J’ 오가던 범인

김양과 첫 만남에서 이 프로파일러는 사건이 예상보다 단순하지 않음을 직감했다. 김양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만났다는 박양이 자신에게 부여해준 캐릭터들을 흉내내며 진술을 피했기 때문이다. 범행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 일을 한 건 제가 아니다”라면서도, 몇 초 뒤 표정을 바꾼 채 “저를 부르셨느냐”고 되물으며 다른 인물인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김양은 자신의 두 캐릭터를 ‘A’와 ‘J’라고 소개했다.

'진실'을 꺼내기 위해선 어느 피의자보다 깊은 수준의 ‘라포(rapportㆍ친밀감 혹은 신뢰관계)’ 형성이 필요해 보였다. 우선 이 프로파일러는 김양의 이상 행동을 만류하지 않고 지켜보기로 했다. 대신 면담 날 아침부터 김양을 찾아가 종일 대화와 식사를 하며 저녁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

두터운 믿음을 쌓기 위해 사라진 시신 일부를 자신의 방 책꽃이에 숨겼다는 진술이 거짓말임을 확인한 후에도 김양을 다그치지 않았다. 이후 김양은 해부학을 공부했다던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다는 등 관심사를 하나 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어진 세번째 면담. 김양의 특성을 파악한 이 프로파일러는 이전에는 하지 않던 질문을 하나 던졌다. “네가 아는 게 정말 많은 건 알지만, 피해자를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방식이 참 잘못됐던 것 같아. 그렇지?” 김양은 그제서야 현실을 직시한 듯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사건 당시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간의 진술과 달리, 피해자의 모습과 피비린내를 기억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이 프로파일러는 “그 한마디에 자신 스스로를 위해 어떤 선택이 옳은지를 깨닫고 마음을 조금씩 열었던 것 같다”고 돌이켰다.

이후 추가된 면담에서 김양이 사건 당시는 물론 전후 과정들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는 단서들이 모였다. 자기 안의 ‘J’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라는 주장에는 큰 변함이 없었지만, 피해자 A양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괴로워 하거나 박양에게 시신 일부를 가져다 주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 프로파일러는 김양의 진술과 태도 변화에 대해 세밀하게 보고서를 적어 내려갔다.


또다른 난관, ‘자캐’ 커뮤니티서 만난 방조범 박양

또 하나의 난관은 시신 일부를 넘겨 받은 박양의 정체였다. 김양은 2017년 2월쯤 ‘베네치아 점령기’라는 온라인 ‘자캐’(자작캐릭터의 줄임말) 커뮤니티를 통해 박양과 알게 됐다고 했다. 개념부터 낯선 이야기였다.



이 프로파일러는 곧장 해당 커뮤니티를 둘러봤다. ‘도축’ ‘마피아’ 등의 주제를 가지고 일종의 상황극을 하는 무대와 같았다. 김양과 박양은 각각 마피아 부두목, 조직원 등의 역할을 맡아 살인과 시신 훼손 등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며 친분을 쌓았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김양은 박양에게 다중인격 증세가 있다고 호소했고, 박양은 김양에게 잔인한 인격을 가진 ‘J’와 쾌활한 성격의 ‘A’라는 캐릭터를 만들어줬단다.

이 프로파일러는 박양과도 얼굴을 마주했다. 박양은 첫 만남에서 “봉투를 건네 받은 것은 맞지만 시신인 줄 몰랐다”며 “모형 선물인줄 알았고 집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이 프로파일러의 판단엔 심상찮은 구석이 적잖았다. 둘은 사건 당일에도 ‘사냥을 나간다’(김) ‘잡아왔어’(김) ‘살아 있어?’(박) ‘손가락 예뻐?’(박) 등의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았고, 김양이 시신을 훼손한 후 불안 상태에 빠졌을 때에도 “눈 앞에 사람이 죽어있다”(김) “침착해라”(박) “‘J’를 불러와라”(박) 등 내용의 통화를 했던 터였다.

김양에게 그랬던 것처럼, 박양에게도 시간을 주기로 했다. 이 프로파일러는 박양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위로하고, 학업 스트레스 등 재수생으로서의 고민을 공감해줬다. 그러는 사이 박양은 사건 당일에 대해 하나 둘 단서를 털어놨다. 서울 마포구 일대에서 만난 김양에게 봉투를 받고 화장실에 가 확인한 후 “실제여서 떨렸다”는 감정, 시신 확인 후에도 김양에게 태연하게 대했던 이유에 대해 “(김양을) 안심시키려 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시신을 받은 다음날인 3월 30일 오전에는 시신을 분해해 음식물 쓰레기와 섞어 1층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진술도 나왔다.


조각났던 사건 전말, 프로파일러 손에 맞춰져

이 프로파일러가 작성한 보고서는 경찰 수사팀뿐 아니라 검찰에도 제출됐다. 해당 보고서는 평범치 않은 사연을 가진 두 피의자들의 범행 전말을 하나 둘 이어 붙였다. 검찰은 김양을 살인 및 사체훼손ㆍ유기 혐의로, 박양을 살인방조 및 사체유기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박양의 살인 공모여부를 두고 긴 법정 다툼이 이어졌지만, 법원에서도 수사팀이 구성한 당시 정황은 대부분 인정됐다. 대법원은 2018년 9월 김양과 박양에 각각 징역 20년, 1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당시 "박양의 살인 공모 혐의는 인정되지 않는다"면서도 "김양이 사건 당일 촬영한 변장 사진을 보낸 시점 이후 부터는 박양이 미필적으로나마 살인 행위에 대해 인식했다고 봐야한다"며 방조죄를 인정했다.

신지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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