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우연한 자리에서 김지은(35)씨를 만난 적이 있다. 2003년 TV에 출연해 자신이 당한 교수 성폭력 사실을 공개적으로 ‘미투’한 최아룡씨가 만든 모임이었다. 성폭력 피해를 당한 이들, 법적 대응에 나선 이들, 그들을 돕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때 만난 그는 커다란 점퍼 안에 웅크리고 있는 듯했다. 안 그래도 가시처럼 마른 몸을 안경과 마스크, 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 김지은씨라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목소리는 작았지만, 내용은 다른 피해자들을 향한 강건한 연대의 말이었다.
-그때 어떤 마음으로 참석했나요.
“우연한 기회로 최아룡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요. 재판을 하는 동안 제게 여러 도움을 주셨어요. 십수 년 전 얼굴을 세상에 드러내고 미투를 하신 선생님은 저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고 터득하신 삶의 지혜를 나눠주셨어요. 모임 얘기를 들었을 때, 저를 돕는 ‘김지은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생각이 났어요. 선생님께 받은 감사한 마음을 갚는 길이 그 자리에 참석해 다른 피해자들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 외에도 가능할 때 다른 피해자들을 만난다고 들었어요.
“한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저처럼 작은 사람에게 주신 연대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있어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게 손을 내밀어주시는 분들을 보며 큰 힘을 얻었죠. 그 마음을 돌려드리는 일이 제가 살아가면서 제 주변의 피해자들을 만나고 연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계속 이어가려고 해요.”
-그렇게 피해자들을 만나거나 도움을 주는 일들을 지속하는 이유가 있나요.
“다시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기 위해서예요. 연대해야 다른 사건을 막을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가르쳐주신 연대의 힘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뿐이에요.”
-성폭력 고발 이후 투쟁기를 담은 책 ‘김지은입니다’에 가족 이야기가 등장하잖아요. 꽃을 좋아하신다는 그 고운 마음의 어머니가 마음의 평안을 찾으셨는지 궁금하고 걱정도 됐어요.
“저의 미투 이후 어머니 건강이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여러 가지로 많은 걱정과 고통을 한꺼번에 맞닥뜨리게 되어서 그런 것 같아요. 미투를 할 때 가장 염려됐던 건 가족이었어요. 가해자 때문에 일어난 범죄였지만, 제가 그런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조차 가족에게 너무 죄송했어요. 성폭력 피해자에게 오는 세상의 비난과 편견도 같이 나눠야 했고요. 그럼에도 저의 선택을 존중해주셨어요. 믿어주시고, 지지해주셨죠. 가족은 저의 마지막 버팀목이고, 제 삶의 근원이에요. 가족이 마음의 평안을 되찾는 일은 제 일상의 복귀만큼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요.”
-책 읽기를 좋아했고, 문학을 전공했다면 원래 작가가 꿈이었나요.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작가는 타고난 예술적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글 쓸 때 행복함을 느꼈지만, 잘 쓰지는 못했어요. 제 꿈은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거였어요. 사람의 이야기가 오가고 책과 전시, 커피가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을 꿈꿨어요. 사람들에게 소소한 기쁨을 나눠줄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죠.”
-의도치 않게 정부부처에서 행정인턴으로 일하게 됐고, 또 우연한 소개로 정치권에 발을 딛게 된 것이라 ‘본래의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대해 혹시 생각해볼 시간이 있었는지 궁금했어요.
“아주 오래 전에 접었죠. 그럴 여유가 없었거든요. 현실은 꿈과 다른 영역에 존재했어요. 저는 병환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실질적인 가장이자, 금융채무자이고, 비정규직 노동자였어요. 생존이 중요했죠. 행정인턴으로 시작해 기간제 근로자, 연구직을 거쳐 어렵게 계약직 공무원이 됐어요. 일밖에 모른다고 할 정도로 열심히 일했어요.”
-노동자로서 보낸 시간은 어땠나요.
“수많은 신분이 나뉘고, 수없는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을 경험했죠. 그래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조금은 더 공정하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갖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직장 선배의 제안으로 (2017년 2월) ‘안희정 대선후보 경선 캠프’에 들어가게 된 거죠.”
-미투 이후 글을 메모처럼 꾸준히 썼고, 또 이후엔 책으로 사건 전후 상황을 정리하기도 했어요. 기록이 주는 힘은 무엇이었나요.
“기록은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외침이었고, 위로였어요. 글을 쓰는 동안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지난 2년간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제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새하얀 종이 위 밖에 없었죠.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고통을 적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기록해야 그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행복이라는 걸 마지막으로 느껴본 게 언제인가요.
“성폭력 상담 교육을 이수했을 때, 이후에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는 곳들을 찾아 도왔을 때예요. 또 제 책을 읽은 독자들이 편지나 직접 만든 잼과 빵 같은 먹을 거리를 보내주시기도 해요. 그런 작은 소통을 했을 때 행복감을 느꼈어요. 최근엔 충남 홍성의 여성 농부들께서 직접 키운 농산물을 출판사로 보내주셨어요. 어떻게 요리하는지 일일이 적은 편지도요. 그걸 꺼내어 보면서 한참을 앉아 울었어요. 아직도 온라인엔 저에 대한 악담과 저주가 넘쳐 나는데, 이렇게 따스한 마음을 나눠주는 분들이 계시다는 생각에 큰 위안을 받았어요. 그런 순간들이 행복을 줘요.”
-현재 가장 바라는 게 있다면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일하고, 동료들과 점심 먹고,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고, 저녁에 친구를 만나 커피 마시고 하는 일상이요. 산산이 깨진 일상을 잘 붙여내고 싶어요. 하지만 여전히 제게는 먼 이야기 같아요.”
-지금까지 인생길을 걸어오면서 지키려고 한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어릴 때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사가 되고 싶었어요. 점차 커가면서 그 소원이란 봉사라는 말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저보다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고 힘든 심경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아낌없이 마음을 나눴어요. (성폭력 피해 이후) 처음에는 주위로부터 거절 당하고 좌절했지만, 결국 저는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됐어요. 저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오며 작게나마 누군가를 도왔던 시간들이, 제게 선한 영향력으로 크게 다가온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받은 도움을 다시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나누면서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더 느끼고 싶어요.”
-이 인터뷰로 혹시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소환해서 더 힘들었던 건 아닌지 걱정이 들어요.
“머릿속에서 지난 고통의 기억들을 모두 도려내고, 나쁜 기억들은 그대로 얼려 심해에 내던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제가 도망치고 숨을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고통을 마주하고, 어떻게든 극복하려 노력해야 결국은 벗어날 수 있겠죠. 한동안은 다시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지금 이 노력만이 고통을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믿어요.”
‘슬기롭게(智), 사람들과 은혜(恩)를 나누며 살라’고 조부가 지어 주셨다는 그의 이름 뜻이 생각났다. 공교롭게도 이름대로 그는 희망을 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너무나 힘겹고 고통스럽지만 말이다. 피해를 말하는 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니까.
그에게 지금 자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노래 가사로 답을 대신했다. 큰 힘이 돼 준 노래였다. 미투 이후 보호시설에 머물 때 이불을 뒤집어쓴 채 이 노래를 들으며 많이도 흐느껴 울었다고 했다.
“누가 내 맘을 위로할까, 누가 내 맘을 알아줄까. 모두가 나를 비웃는 것 같아 기댈 곳 하나 없네. 이젠 괜찮다 했었는데,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다시 찾아온 이 절망에 나는 또 쓰러져 혼자 남아 있네. 내가 니 편이 되어 줄게. 괜찮다 말해 줄게. 다 잘 될 거라고, 넌 빛날 거라고, 넌 나에게 소중하다고. 모두 끝난 것 같은 날에 내 목소릴 기억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넌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커피소년’의 ‘내가 니 편이 되어 줄게’였다. 이건 그가, 아니 모든 성폭력 피해자가 세상으로부터 듣고 싶은 말일 거다.
이 기사에도 가시 돋친 말들을 댓글로 다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괜찮다고, 다 잘될 거라고, 나는 당신 편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란다. 희망의 증거는, 우리가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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