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금지법은 말한다  "동정에 오줌을 갈겨라"

입력
2020.07.24 04:30
18면

편집자주

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6>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부심'


어떤 책은 너무 아름다워서 그에 대해 쓰려고 하면 무람해진다.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이 그런 책이다. 나의 하찮은 재주로는 쓰면 쓸수록 더욱 책의 영롱함으로부터 멀어지겠지만, 그르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하고서 나는 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 때문이다.

지난 6월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대표 발의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국민이 성별, 장애, 나이, 출신지역 등 23개의 사유로 인해 ‘고용, 교육, 재화와 용역, 행정 서비스’ 네 가지 공적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규정하는 법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 따르면 2020년 현재 국민의 88.5%가 제정에 찬성하고 있다.

하지만 반대도 만만하지 않다. 이들은 “학교에서 항문성교를 가르치는 법”이라거나 “동성애가 죄라고 설교할 수 없게 된다,” “무슬림이 판을 치는 나라가 될 것이다” 등의 가짜뉴스를 유포하며 법 제정을 막아왔다. “현행법에 이미 장애인차별금지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 등 차별을 금지하는 개별법이 있는데, 왜 또 다른 법을 만들려고 하냐”는 건 이번에 새롭게 추가된 반대 사유다.

이와 관련해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는 한 토론회에서 “(차별받은 사람이) 장애인이면서 동시에 여성일 수 있는데, 차별시정기구가 각각 다르면 비효율이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개별적 사유와 영역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할 수 없듯, 차별시정기구도 사유별로 설립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홍 교수의 말처럼 한 사람의 정체성은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얽히면서 형성된다. 차별금지법은 이런 교차성의 문제를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그리고 '망명과 자긍심' 역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에세이다.



저자인 일라이 클레어는 미국의 벌목지대에서 태어나, 교육 수준이 낮고 보수적인 시골의 노동자 커뮤니티에서 자란 백인이다. 그는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이자, 스스로를 남성이나 여성, 둘 중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 젠더퀴어이고,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며, 페미니스트다. 그는 수많은 소수자성이 교차하는 몸으로 세계에 존재하면서 품게 되는 여러 질문들에 대해 사유한다.

그는 말한다. “젠더는 장애에 다다른다. 장애는 계급을 둘러싼다. 계급은 학대에 맞서려 안간힘을 쓴다. 학대는 섹슈얼리티를 향해 으르렁댄다. 섹슈얼리티는 인종 위에 포개진다. 이 모든 것이 결국 한 사람의 몸 안에 쌓인다.”



한 챕터에서 그는 ‘슈퍼장애인’ 신화를 비판한다.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조차’ 해내기 어려운 과업을 달성하는 장애인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는 장애 ‘극복’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그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인 각각의 장애인을 영감의 상징으로 둔갑”시킨다.

이런 이야기들은 손상(impairmentㆍ사지의 일부나 전부가 없는, 혹은 사지나 신체 조직이나 구조에 결함이 있는 것)을 장애(disabilityㆍ당대의 사회가 손상 있는 이들을 전혀 혹은 거의 고려하지 않아 사회의 주류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야기되는 불이익이나 활동의 제약)로 둔갑시키는 환경은 못 본 척 한다. 개인의 성공 위에 화려한 폭죽을 터트리면서 소외와 차별을 지속시키는 구조를 가리는 것이다. 동시에 ‘실패’하는 개인은 쉽게 동정한다.



소수자는 찬양이나 동정을 바라지 않는다. 소수자는 물리적, 사회적, 법적 환경의 변화를 원한다. 평등하게 교육 받고, 정당하게 고용되며, 수사와 재판을 받을 권리를 누리고, 버스를 타거나 극장을 이용할 때 과도한 어려움이 없었으면 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당연한 일을 이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편견은 바뀌어 나갈 터다.

클레어는 말한다. “동정에 오줌을 갈겨라(piss on pity).” 차별금지법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시혜와 동정은 됐다. 공적영역에서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라.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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