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x최규석 '의기투합'...불확실성이 빚어낸 '지옥' 을 그리다

입력
2020.07.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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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상호 감독x최규석 작가 '지옥' 동반 인터뷰


1990년대 후반 한국 만화와 애니메이션 시장은 암흑기였다. 만화잡지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일본ㆍ미국 등 애니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며 제작된 국산 극장용 애니메이션 대부분은 흥행과 비평 양 측면에서 모두 참패했다.

하지만 암울함 속에서도 새싹은 잉태되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 같은 대학에서 친한 친구로 지내며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꿈을 함께 키워나가고 있던 연상호와 최규석이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연상호는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과 영화 ‘반도’를 칸 국제영화제에 보낸 감독이 됐고,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에서 시작해 ‘습지생태보고서’ ‘송곳’ 등을 선보인 최규석은 한국적 리얼리즘 만화 작가로 각광받고 있다.

이들 둘이 드디어 만났다. 친분으로 봤을 땐 그간 몇 번이고 공동작업을 하고도 남았겠지만 애니메이션 캐릭터 원화 작업을 넘어 연 감독과 최 작가가 본격적으로 뭉친 건 네이버웹툰 '지옥'이 처음이다. 어느날 지옥행을 통보받은 사람들로 혼란에 빠진 세상을 그려낸 이 작품은 이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제작이 확정됐다. 연출은 당연하다는 듯 연 감독이 맡았다. ‘지옥’의 책 출간을 맞아 지난 15일 경기 부천 만화영상진흥원에서 둘을 함께 만났다.


연 감독과 최 작가가 본격적으로 의기투합한 건 처음이다. 어떻게 함께 작업하게 됐나?

연상호(연)=한창 때는 매일 전화통화 할 정도로 친했는데 바빠지면서 일 년에 한 번밖에 못 봤다. 재작년쯤 맥주 한잔 하다가 작업을 같이 하면 자주 보지 않겠나 해서 2003년 내가 제작한 단편 애니 ‘지옥’을 베이스로 새 이야기를 꾸리게 됐다.

최규석(최)=뻔뻔한 설정을 뻔뻔하게 몰고 가는 연 감독 특유의 작품 분위기를 원래도 좋아한다. ‘지옥’은 폭넓은 설정 아래 현실적인 이야기를 녹여낼 수 있어 할 수 있는 게 많을 것 같았다. 사실 친해진 계기도 2003년에 단편 ‘지옥’을 보고 너무 괜찮은 작품이라 내가 들이대면서부터다. (웃음)



‘지옥’에 가는 순간이 ‘고지’된다는 것을 제외하면 2003년 애니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만화에서는 사이비종교인 ‘새진리회’가 이야기의 중심이다.

연=인간의 여러 연약한 면 중에서도 ‘불확실성을 못 견디는’ 연약함에 한국 사람들이 특히 취약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이 일종의 종교적 느낌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본다. 불확실성을 못 견디기 때문에, 확실한 것을 찾고 의지하려고 하는 거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도 잘 어울리고.


죄를 지어서 지옥 가는게 아니라 왜 지옥에 가는지 모르게 했다. 그렇게 무작위로 고지를 내리는 신을 설정한 이유가 뭔가.

최=초기 인간세계에 종교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떠올려봤다. 고대인들은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의 이유를 알지 못해 공포에 휩싸인다. 그때와 비슷한 공포를 현대인들이 느끼게 하려면 설명이 불가능한, 그러나 누군가의 의지가 깊숙이 관련돼 있을 것 같은 현상이 필요할 것 같았다.

연=‘코스믹 호러’라는 장르가 있다. 절대적이면서도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를 다룬다. 그게 바로 인간이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공포라고 생각한다.


‘새진리회’를 이끄는 정진수는 “신의 의도는 명확하다. 너희는 더 정의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선의가 세상을 더 낫게 할 수 있나.

연=답은 없다. 다만 정진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정진수는 작금의 현상으로 이로운 세상을 꾸미려는 인물이다. 하지만 과연 세상을 더 낫게 만든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지 평균치로 만드는 게 더 나은 것인가, 그런 의문을 작품을 통해 묻는 것뿐이다. 답은 독자 각자에게 있다.



최 작가의 경우 ‘송곳’처럼 현실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지옥’은 색다른 작업인데.

최=사실 나도 데뷔 초반에는 판타지를 그리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는 워낙 만화판이 죽어가던 시기라 만화를 연재할 수 있는 매체가 별로 없었다. 신문 연재를 주로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르포 만화가가 됐다. 내가 처음 만화에 빠졌을 때 느꼈던 경이감이나 놀라움에서 오는 희열을 정작 내 만화의 독자들에게는 주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나도 그런 작품을 해야겠다 싶었는데, 마침 연 감독이 제안을 준 거다.

연=규석이는 학교 다닐 때부터 잘 나갔다. 졸업하고 유일하게 고정수입이 있는 작가였는데, 당시 우리가 볼 때는 규석이가 사회적인 작품을 많이 하니까 잘 되는 것 같아 보였다.(웃음) 그래서 나도 따라서 ‘돼지의 왕’ ‘사이비’같은 사회파적인 애니도 만든 거 같다. 확실히 이번 만화를 보면 규석이가 그림에서 새로운 재미를 추구하려 했다는 게 느껴진다. 물론 크게 보면 ‘송곳’이랑 뭐가 다른가 싶기도 하다.

최=사회적인 작품을 오래하다 보니 생긴 습관이다. 설정은 판타지인데,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 때 자꾸 현실세계에서 개인과 조직의 움직이는 방식을 고심하게 된다. '이게 (실제로) 말이 되냐'고 연 감독한테 물어보면, 자꾸 '시나리오상은 그렇다'고 대답해서 답답하다.(웃음)



‘지옥’은 넷플릭스에서 영화로 제작된다. 실사영화 등 다른 작업과 어떤 차이가 있나.

연=극장 실사 영화는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보수적이다. 보편적인 관객을 타깃으로 한다. 반면 넷플릭스에서는 글로벌한 관객을 대상으로 하니까 매니악한 취향을 드러내도 된다는 기대가 개인적으로 있다.

최=영상에서는 사자(使者)의 무정형적인 외형이 잘 구현됐으면 좋겠다. 정말로 이 세계에서 넘어온 생명체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었으면 한다. 그 외에는, 내 그림체가 워낙 현실적이어서 영상화가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연=만화를 영상 콘텐츠 업계에서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한창 고민을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고민을 안 하기로 했다. 다만 최규석이라는 좋은 작가와 함께 작업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1부가 책으로 묶여 나왔고, 2부가 웹툰으로 연재 중이다. 엔딩을 귀띔해준다면.

연=‘지옥’은 어느 시점에서 끝이 나도 상관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2부로 완결되긴 하지만, 언제든 다시 재개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만 존재하는 세계니까, 이 세계 안의 다른 사람 얘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전에 했던 좀비물이나 '방법' 같은 오컬트물이 장르화된 법칙 안에서 움직인다면, 개인적으로 ‘지옥’은 언제든지 하고 싶은 얘기, 놀고 싶은 거리가 있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세계관이다.

최=무너진 건물을 그리지 않아도 가능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기 때문에, 완벽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세계라고 생각한다. 독자마다 좋은 엔딩, 나쁜 엔딩이란 생각이 들 순 있지만 적어도 왜 여기가 끝이지 하는 생각은 안 할거라고 본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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