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행 혐의로 피소되면서 위계질서가 비정상적이고, 폐쇄적으로 운영된 시장 보좌업무 환경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당장 박 전 시장이 새벽에 즐긴 마라톤이 잡음이 컸던 부분으로 지목되고 있다.
20일 서울시 관계자 등에 따르면 박 전 시장은 2017년부터 새벽 6시께 공관에서 출발해 남산 일대 5~6km를 1주일에 2번 정도 뛰었는데, 이 마라톤 보조 업무가 왜곡된 비서의 역할을 조장했다고 피해자가 최근 폭로했다. "시장이 마라톤을 하는데 여성 비서가 오면 기록이 더 잘 나온다" "평소 1시간 넘게 뛰는데 여비서가 함께 뛰면 50분 안에 들어온다"는 등 평일이 아닌 주말 새벽에 나오기를 요구받았다는 게 피해자의 주장이었다.
마라톤 일정을 둘러싼 잡음은 1년 여 전부터 수면 위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2월 방송된 KBS2 예능프로그램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에서 남성 비서관 A씨는 박 전 시장과 새벽에 마라톤을 뛴 뒤 "혼자서 하시지 왜"라고 한숨을 쉰다. 새벽에 불려 나가 잠을 설칠 수 밖에 없는 데 대한 푸념이었다. A씨는 박 전 시장과 새벽 마라톤을 뛰기 위해 새벽 6시 전에 출근해야 했다. 무릎 수술을 했던 그는 발목이 안 좋아 침을 맞으며 박 전 시장의 마라톤을 '보조'했다. 방송 당시 "(힘들다고) 말을 하지 않아 몰랐다"고 해 '꼰대' 정도로 희화화됐던 박 전 시장은 전 비서 성추행 의혹이 불거지면서 가부장적인 생활 패턴이 새삼 부각되고 그로 인해 성인지 감수성이 무뎌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이념적으론 페미니스트를 자처했지만, 일상에선 반대였던 박 전 시장의 모순이 성추행 의혹을 '잉태'했다는 비판이 쏠리는 배경이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진보와 인권에 대해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일상에선 그 이념들이 채 구현되지 못한 시대를 산 이들이 '586세대'이고 (윗세대지만) 그중 한 명이 박 전 시장"이라며 "'남성 비서가 말을 하지 않아 싫은지 몰랐다'고 한 대목은 자기가 느끼는 것을 남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지 않겠냐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권력자의 시선"이라고 진단했다.
지난달 서울시에 낸 '시민인권보호관 인권침해 결정례집'에 따르면 시 산하기관에선 계약직 여성에 하트 모양 이모티콘과 함께 "귀염. 일어나야지" 등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 남성 직원이 시정 권고를 받았다. 이 사례는 성희롱으로 분류돼 박 전 시장 등에 보고됐고, 인권보호관은 박 전 시장에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할 것을 권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작 박 전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 측은 지난 13일 박 전 시장이 전 비서를 텔레그램 비밀대화방에 초대했다는 사진을 성추행 의혹 증거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