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직후 '서울사수' 방송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입력
2020.07.23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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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통령 떠난 뒤 ‘서울사수’ 방송

편집자주

삶의 뿌리가 통째로 뽑힌 동족상잔의 비극이 꼭 70주년을 맞았다. 임진왜란, 6.25전쟁 등 한반도 격전지 답사에 천착해온 한국일보 출신 원로 언론인 문창재 칼럼니스트가 알려지지 않은 6.25 비극을 6회로 나눠 싣는다.


6·25 직후 ‘서울사수’ 방송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가정이 가능하다면 한강이 끊기기 전에 많은 국민이 피란을 떠났을 것이다. 따라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훨씬 많았으리라는 게 정답일 것이다. 전황을 속이지 않고, 서울을 사수하겠으니 '미동도 말고 군 작전에 협조하라'는, 국민을 속이는 방송이 없었다면 당연히 일찍 피란을 서둘렀을 테니까.

대통령과 군과 정부가 다 서울을 떠난 다음날 아침까지 국민을 안심시키는 방송은 계속되었다. 전쟁 제1보는 25일 오전 7시였다. 그때부터 한강인도교가 폭파된 28일 오전 2시까지는 43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그 사이 군과 정부와 대통령은 끊임없이 “서울은 안전하다”는 방송을 거듭했다. 동요를 예방하려는 의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국민의 희생을 키운 셈이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중앙방송국(HLKA) 업무는 26일부터 공보처에서 국방부 관장으로 넘어갔다. 방송내용 일체가 군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양쪽의 통제를 받은 27일, 뉴스를 내보냈다가 취소하는 전대미문의 사태가 벌어졌다. 정부가 수원으로 옮겨갔다는 뉴스가 곧 취소된 것이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몰라 국민은 우왕좌왕이었다.

민정호(閔薡鎬) 당시 중앙방송국장 대리의 회고다. “27일 새벽 6시 조금 전이었는데, 신성모(申星模) 국방장관이 비서를 시켜 쪽지를 보내왔어요. 정부를 수원으로 옮겼다는 뉴스를 내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서둘러 6시 뉴스에 내보내고 얼마 안 됐는데, 이번에는 이철원(李哲源) 공보처장 전화가 왔어요. 그 뉴스를 취소하라는 겁니다. 결국 뉴스를 취소하는 방송을 내보냈는데, 벌써 거리에는 피란민이 부쩍 늘었습니다.”(언론자료편찬회 <한국전쟁 종군기자>)

26일에는 국군이 해주를 점령한 기세로 평양 원산을 향해 진격 중이라는 뉴스를 거듭하며, “국민은 국군을 믿어야 한다”고 했다.

27일 오후 1시에는 국방부 보도과장 김현철 대령이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의정부 전투에서 승리했고, 전황이 좋아져 수원 천도 결정이 취소되었으며, 정부는 여전히 수도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기만방송이 반복되었다. 국회의 서울 사수 결의를 빼고는 다 거짓이었다.

오후 4시에는 “맥아더사령부가 서울에 전투사령부를 설치키로 했고, 내일부터 미군이 참전하게 될 것이므로 현 전선을 고수하게 된다”는 특별방송이 있었다. 이런 희망적인 방송이 거듭되다가, 밤 10시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방송이 나와 국민은 안심을 굳히게 됐다.

당시 국방부 보도과 방송계장 홍천(洪泉) 중위는 그 경위를 이렇게 전했다. “밤 10시 조금 못 돼 정훈국에서 대통령의 담화 녹음을 보내왔어요. 즉각 내보내라는 겁니다. 밤 10시 뉴스부터 내보냈는데, 들어보니까 현 사태와는 너무 거리가 먼 거예요. 그때 프로를 메우기 위해 와있던 사회명사와 문인들이 더 이상 내보내면 안 되겠다는 겁니다. 나도 동감이라서 중단하고 말았습니다.”(한국전쟁 종군기자) 방송국에서도 포성이 가까이 들리는 시점이었다.

대통령 육성방송 내용이 “서울을 사수하겠으니 국민은 안심하라”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오키나와에 있던 미국 해외방송청취기관이 중앙방송을 녹취해 국무성에 보낸 일일보고 기록을 요약하면 “(국군이 맞서 싸울 무기가 없는) 이 암울한 상황에서 나는 도쿄와 워싱턴에 연락하여 지원을 요청했는데, 오늘 오후 맥아더 장군 전보를 받았다. 미국이 수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군수물자를 보냈다니, 곧 도착할 것이다. 이 좋은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자 방송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울사수’ ‘안심’ 같은 말은 없지만, 오후에 방송한 정부 발표를 부정하지 않고 더욱 희망을 갖게 한 점에서 크게 다를 것 없다. 방송 내용보다는 마치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그 경위가 더 흥미롭다. 한국방송인동우회 이사 이장춘이 당시 대전방송국 방송과장(유병은)의 회고록을 근거로 정리한 동우회 블로그에 따르면, 유병은 과장은 방송국으로 찾아온 헌병사령관 장흥(張興) 대령에게 납치당하듯 끌려가 충남도지사 관사에 갔다. 방송기기를 그곳에 가져오게 하여 대통령이 말하는 것을 녹음해 여러 차례 방송하게 했다. “누가 물어도 대전에서 방송한 사실을 말해서는 안 된다”는 위협까지 당했다.

국민 몰래 서울을 떠나 멀리서 방송한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은 일이었다. 하긴 국민의 눈이 두려워 신 새벽에 선글라스 끼고 나선 피란길이었으니 그럴 법도 했다. 이렇게 떠난 대통령의 피란길도 기만방송에 못지않은 수수께끼다. 국정과 군통수권을 팽개친 잠행이 너무 길었다.

27일 자정 심야 국무회의에서 수원천도를 결정한 뒤 대통령은 이기붕(李起鵬·서울시장) 신성모(申星模·국방장관) 등의 권유를 받아들여 피란 의지를 굳혔다. 사실은 첫날부터 맘먹은 피란이었다. 주한 미국 대사 무초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대통령의 피란을 반대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이미 의정부가 떨어진 마당이었다.

대통령은 27일 새벽 3시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비서 황규면(黃圭冕)과 셋이서 경무대를 나서 4시 객차 2량을 연결한 특별열차편으로 서울역을 떠났다.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이때를 전후해 정부요인 국회의원 각기관장들과 그 가족이 피란길에 올랐지만, 국민에게는 극비였다.

열차는 대구까지 달려갔다. ‘너무 멀리 온 것 아니냐’는 측근의 귓속말이 주효했을까. 대통령은 열차를 돌려 대전으로 가자고 했다. 그렇게 되짚어 온 대전에서 29일 맥아더 방한을 마중하러 수원비행장에 갔다 와서 또 대전을 떠났다. 이번에는 호남 방향이었다. 한강방어전이 한창이던 7월 1일, 승용차 편으로 떠났다.

비포장 빗길을 달리다 이리(지금의 익산)에서 자동차가 고장 났다. 8시간을 기다려 기차로 갈아타고 목포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는 해로였다. 열차 안에서 배편이 마련되기를 2시간 넘게 기다려 해군 소해정 편으로 19시간 항해 끝에 부산에 닿았다. 배 멀미에 시달리며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바다를 헤쳐 간 위험한 뱃길이었다. 일주일여 부산에 머물다 또 대구로 올라간 것이 7월 9일.

경무대를 떠나 돌고 돌아 다시 대구에 도착한 열흘 남짓 동안, 이 나라에는 대통령이 없었던 셈이다. 측근 몇을 빼고는 아무도 그의 소재지를 몰랐다. 알만 하면 떠나고, 또 떠나기가 몇 번인가.

왜 대구에 갔을까. 가장 안전한 부산을 두고 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애초에 가려던 곳이었기 때문에? 대전을 그토록 일찍 떠난 이유는 또 무엇이었을까. 대전은 7월 20일에 함락되었으니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대구로 갈 생각이었으면 왜 호남으로 돌아 위험한 뱃길을 택한 것이었을까.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들은 대통령의 귀에 달콤한 말만 불어넣는 간신배 부류 때문이었다는 게 통설이다.

“내가 잘못 판단했어. 이렇게 빨리 부산에 오지 않아도 되는 건데···. 미국 사람들 정보에는 왜 이렇게 엉터리가 많지!” 부산에 도착해 전화로 국방부 장관을 불러, 아직 한강방어선이 지켜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는 말이다.

대전에서 호남을 돌고 돌아 위험한 뱃길로 온 고생에 화가 난 것이었다. 대전에서 대구는 지척이다. 처음처럼 기차로 가면 두 시간 거리인데, 왜 그랬을까. 한 측근이 추풍령 일대에 빨치산이 준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미군정보를 귓속에 불어넣었다. 우리 군경에 명령을 내려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가면 될 것을, 국군보다 미군을 믿은 탓이었다.

그러고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대통령이었다. 국회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결의를 통과시켰지만 소용없었다. 정부를 따라 대전으로 내려온 신익희(申翼熙) 의장과 조봉암(曺奉岩) 장택상(張澤相) 의원이 충남지사 관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가 국회결의를 통보했다. 국민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는 ‘국회의 뜻’이었다. “내가 왜 사과를 해? 사과하려거든 당신들이나 해요.” 즉석에서 돌아온 응답이 이랬다.

사과는커녕, 다리가 끊겨 피란을 가지 못 한 시민들에게 ‘부역자’ 누명을 씌운 서울 잔류인 조사는 또 무언가. 9·28 서울수복 후 ‘잔류파’ 시민에게 가한 혹독한 사상검증도 대통령 뜻이었으니, 적반하장도 이럴 수는 없다. 보도연맹 사건이다, 국민방위군사건이다, 하는 학살극과 치사극의 정점에도 그가 있었으니, 그에게 국민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문창재 칼럼니스트(전 한국일보 논설실장)

필자는 2004년 한국일보 논설실장으로 퇴직한 후 내일신문 객원논설위원을 거쳐 올해 3월까지 논설고문으로 일했다. 저서에 '정유재란 격전지에 서다' '증언(바다만 아는 6.25 전쟁비화)' '나는 전범이 아니다' 등 10여권이 있다.

<글 싣는 순서>
(1) 인민군은 왜 서울에서 사흘을 머뭇거렸나
(2) 해주점령 오보의 파장과 영향
(3) 남진을 주춤거린 동해안 축선
(4) 대통령 떠난 뒤 ‘서울사수’ 방송
(5)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
(6) 이형근 장군이 본 10대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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