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란 지적 능력을 포함한 정신 활동을 뜻한다. 본디 개인적인 성향을 지닌다. 이러한 지성의 집단적 성향을 부각시킨 말이 ‘집단지성’이다. 집단지성은 정보사회의 진전이 낳은 대표적 현상 중 하나다. 때때로 일국적 경계를 넘어 지구적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이러한 집단지성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집단지성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과 군집지성(swarm intelligence)의 차이다. 행정학자 권찬호의 ‘집단지성의 이해’에 따르면, 군집지성이란 곤충, 로봇, 시뮬레이션, 알고리즘 등 인지적으로 단순한 행위자들의 창발적이고 집합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개미 연구가로 유명한 윌리엄 휠러는 군집지성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선구자로 꼽힌다.
집단지성이란 이러한 군집지성에 더해 인간의 행위까지를 포괄한 개념이다. 권찬호에 따르면, 집단지성이란 의식 있는 개체들이 집단을 이뤄 집단 내외부에서 협력하거나 경쟁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능력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 집합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가는 능력이 집단지성이다.
이러한 집단지성에 대한 관심은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집단지성이 본격적인 관심을 모은 것은 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였다. 1980년대 이후 집단지성은 곤충의 행동으로부터 로봇의 집단적 행동, 컴퓨터로 연결된 인간 집단의 협력을 설명하는 데 빈번히 사용되기 시작했다.
집단지성 담론을 널리 알리는 데는 사회학자 피에르 레비와 언론인 제임스 서로위키의 역할이 컸다. 레비의 관심사는 정보사회의 진전이 가져온 사이버 공간에서 새로운 지식공동체로서의 집단지성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레비는 1994년에 발표한 ‘집단지성’에서 “21세기 주된 건설 프로젝트는 사이버 공간이라는 유동적이고 쌍방향적인 대화 공간을 상상하고 건설하고 조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로위키가 2005년에 내놓은 ‘대중의 지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서로위키의 메시지는 간단하면서도 분명하다. 전문가의 지식보다 대중의 지혜가 더 낫다는 것이었다. 사회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엘리트의 결정을 중시할 것인지, 대중의 판단을 중시할 것인지는 오랜 논쟁을 이뤄온 주제다. 이에 대해 서로위키는 다수의 대중이 소수의 엘리트보다 더 나은 해법을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집단지성의 대표적 사례로는 위키피디아를 들 수 있다. 2001년 등장한 위키피디아는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지식 생산과 공유의 거대한 창고를 이뤘다. 누구나 참여하는 집단지성과 지식 공유는 위키피디아를 이끈 힘이었다. 2018년 위키피디아는 구글, 유튜브, 페이스북, 바이두에 이어 세계에서 방문자들이 가장 많은 다섯 번째 웹사이트라는 자리를 차지했다.
위키피디아가 소개하는 집단지성 사례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을 보면, ‘크라우드소싱’, ‘오픈 소스’, ‘네이버 지식iN’, 그리고 서로위키가 ‘대중의 지혜’에서 소개한 ‘집단지성 실험’ 등이 그 예로 소개되고 있다. 집단지성이 문제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그 해법을 찾아간다는 것을 주목할 때, 집단지성의 영역은 넓다. 쌍방향 소통을 추구하는 ‘웹 2.0’은 집단지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지성에는 명암이 존재한다. 작가 찰스 리드비터는 ‘집단지성이란 무엇인가’에서 민주주의, 평등, 자유의 관점에서 이를 살펴본다.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집단지성으로서의 웹은 참여와 소통을 활성화시켜 시민들을 민주주의 광장으로 이끌어낸다. 웹은 소통을 중시하는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민주주의론, 참여를 중시하는 퍼트남의 사회자본론에 새로운 활력을 부여한다.
평등의 관점에서 집단지성은 양면적 특성을 갖는다. 한편에서 웹의 협업적 특징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좋은 인맥을 확보한 사람들은 웹을 통해 더 좋은 인맥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오픈 소스 방식으로 생산된 지식과 정보가 불평등을 개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은 무료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이용을 선도해 왔고, 이를 통해 생동하는 개발자 커뮤니티들을 발전시켜 왔다.
자유의 관점에서도 집단지성은 양면성을 지닌다. 한편에서 집단지성은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의 확장에 기여한다. 특히 젊은 세대는 집단지성을 통해 협업적 개인주의자들로 변모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사회적 감시를 증가시키고, 사생활 영역을 축소시키며, 순응을 강요하는 집단 압력을 증대시킨다. 자신의 생각보다는 집단의 생각을 따르는, 작가 재런 래니어가 말한 ‘디지털 마오이즘’의 위험을 집단지성은 안고 있다.
이러한 양면성에서 리트비터는 그 긍정적 측면에 무게를 더한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아이디어를 공유해야 한다. (...) 아이디어를 공유하면 아이디어는 점점 늘어나고 자라나서 아이디어를 더욱 강화하는 순환 고리를 이룬다. 우리는 무엇을 갖고 있느냐뿐만 아니라 무엇을 공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규정된다.”
2020년대에 집단지성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경제적 측면에서 집단지성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경제학자 앤드루 맥아피와 에릭 브린욜프슨은 ‘머신, 플랫폼, 크라우드’에서 집단지성으로서의 군중(크라우드)에 주목한다. 이들이 말하는 군중은 온라인으로 결집할 수 있는 인간 지식, 전문성, 열정을 의미한다.
맥아피와 브린욜프슨에 따르면, 군중의 힘을 잘 보여준 사례는 리눅스 개발과 비트코인 열풍이다. 군중은 리눅스와 같은 유용한 생산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협력을, 비트코인과 같은 새로운 상품 및 서비스를 창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두 사람이 강조하듯, 기업과 경제의 미래가 집단지성으로서의 군중과 이에 대응하는 ‘핵심 역량’을 어떻게 결합할지에 달려 있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정치와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집단지성은 양면성이 두드러진다. 먼저 긍정적 측면에서 집단지성은 참여민주주의를 진전시키고, 공동의 의사결정으로서의 거버넌스를 성숙시킨다. 또 인터넷에 기반한 취향과 문화 공동체를 활성화시킨다. 하지만 동시에 부정적 측면에서 집단지성은 배타적 부족주의 및 집단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다. 조화순 등의 ‘집단지성의 정치경제’는 21세기 오늘날의 집단지성이 지난 20세기의 나치즘이나 문화대혁명과 같은 집단 광기에 휩쓸릴 수 있는 가능성을 경고한다.
앞으로 정보사회의 진전이 불가피하듯, 집단지성의 영향력 또한 갈수록 커질 것이다. 집단지성이 안겨주는 교훈은 ‘나’보다 ‘우리’가 더 똑똑하다는 데 있다. 모두가 참여하고 공유하는 우리 공동의 미래가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지성이 관심을 끈 것은 2008년 촛불집회를 통해서였다. 당시 포털 다음의 ‘아고라’는 촛불집회를 이끈 원동력 중 하나였다. 포털 네이버의 네이버 지식iN과 함께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집단지성이었다.
이러한 한국적 집단지성은 네트워크 개념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 네트워크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을 잇는 연결자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그런데 이제 집단으로 이뤄진 네트워크 자체가 스스로 주체화해서 개인과 집단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이후 집단지성은 다양하게 응용됐다. 2016~17년 촛불집회에서 펼쳐진 시민 공론장, 시민 또는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시민참여예산제 혹은 국민참여예산제, 미국의 ‘Challenge.gov’를 벤치마킹한 ‘도전.한국’ 등은 대표적인 사례다. 집단지성을 통해 한 명의 천재보다 백 명의 대중이 훨씬 더 지혜롭다는 것을 발견해온 셈이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지성은 정책의 영역에서 혁신적 대안이다.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굴하고 정교하게 가다듬는 데 더 나은 해법을 제시한다. 하지만 정치의 영역에서 집단지성은, 앞서 지적했듯, 명암을 가진다. 참여민주주의를 증진시킨다는 점에서 긍정적 측면을 보여주지만, 개인의 자율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부정적 측면을 드러낸다. 특히 집단지성이 진영 정치와 결합할 때 사회갈등을 더욱 구조화시킬 수 있다는 점은 적잖이 우려스럽다.
집단지성의 키워드는 ‘함께’다. 21세기가 나 홀로의 엘리트가 아닌 함께의 대중이 주도하는 시대가 될 것임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새롭게 열리는, 빛과 그늘을 동시에 갖는 이 집단지성 시대에 대한 사려 깊은 성찰이 요구된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