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에요. 어르신 한 명이라도 돌보고 있으니.”
경기 안산시에서 재가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장진숙(가명ㆍ59)씨는 지난 2월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유행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자 장씨가 일하던 가정 3곳은 일제히 ‘감염이 우려된다'며 서비스 중단을 통보했다. 하지만 그가 기댈만한 정부 지원은 없었다. 요양센터에서 일하며 고용보험 가입 이력이 있는 탓에 고용보험 미가입자를 중심으로 한 긴급고용안정지원금 신청은 불가했다. 그렇다고 실업급여를 받은 것도 아니다. 센터가 장씨를 ‘자발적 퇴사자’로 처리해 요건이 안 됐기 때문이다.
장씨는 다행히 이달 초부터 다시 한 가정을 방문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일터는 여전히 위험 투성이다. 코로나19에 가장 취약한 80대 치매노인을 돌보고 있지만 기본 수칙을 지키는건 언감생심이다. 장씨는 “마스크를 써도 어르신이 이를 잡아당겨 벗겨지기 일쑤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원격 근무가 가능한 소수 외 모든 노동자가 더욱 가난해지고, 감염에 노출될 것.’ 미국의 전 노동부장관인 로버트 라이시 미 버클리대 공공정책대학원 교수가 분석한 코로나19 이후 신(新) 계급 불평등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언택트(비대면)’ 노동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은 장씨 외에도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 대면 노동자들은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장 먼저 일자리를 잃었고, 감염의 공포를 견뎠다. 하지만 신종 감염병 유행이 6개월을 넘어 이제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된 지금도 이들의 안전을 위한 대책은 공백상태다.
20일 사회공공연구원에 따르면 코로나19 감염 위험이 높은 노동자는 약 1,214만명으로 전체(약 2,306만명)의 약 57%로 추정된다. 2017년 근로환경조사에서 ‘고객, 승객 등 직장동료가 아닌 사람을 직접 상대하는 업무’에 근무시간의 절반 이상을 할애한다고 답한 직종을 바탕으로 추산한 결과다.
이중 환자ㆍ고객 접촉이 업무의 핵심인 보건의료ㆍ복지업종은 단연 감염우려가 높다. 그러나 의사ㆍ간호사 등 의료인에 비하면 요양ㆍ간병 등 의료복지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대책은 전무하다. 환자의 식사ㆍ목욕은 물론 배변까지 책임지는 돌봄노동 특성상 접촉은 의료인 못지 않지만, 이들에게는 방호복은커녕 마스크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감염 예방ㆍ치료는 물론 안전을 입증하는 부담까지 오롯이 돌봄노동자의 몫이다. 재가요양보호사나 산후관리사는 새 가정에서 일을 시작할 때마다 직접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음성확인서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지현 요양서비스노조 사무처장은 “방문요양 월급 60만원 남짓을 벌기 위해 매번 20만원정도의 검사비를 내야하니 일할수록 남는 게 없다”며 “노인장기요양보험 수급자의 안전을 위해 최소한 검사부담이라도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유망 산업이 된 택배ㆍ배달업 노동자들도 감염위험이 높다. 하지만 이들은 배달물량 급증으로 생활 방역수칙조차 지키지 못하는 역설에 빠졌다. 서울에서 배달원으로 일하는 고형석(가명ㆍ30)씨는 하루 8~12시간을 업무로 보내지만, 그 동안 손을 씻는 건 1~2번 정도다. “배달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음식배달 플랫폼에서 별점이 깎이기 때문에 화장실 갈 정신도 없다”는 이유다. 고씨는 “30초 사이에도 수입이 갈리는데 그시간에 손을 씻는건 무리”라며 “식당에 들어가 가끔 손소독제를 쓰는 정도”라고 말했다.
고씨의 숨막히게 바쁜 노동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될수록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최근 대거 배달 플랫폼 노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구교현 라이더유니온 기획팀장은 “코로나19 이후 일명 ‘배민커넥터’같은 단기ㆍ일용 배달노동자가 전보다 약 3배 늘었다”고 말했다. 구 팀장은 “이 추세가 계속되면 제한된 주문을 두고 경쟁이 심해져 감염병 외 부상 위험도 커지고 수입도 줄 것”이라며 "이로인해 산재피해가 늘어나도 한 플랫폼에서 수입이 100여만원 이상 나지 않으면 전속성 입증이 어려워 보상을 받기도 힘들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발 고용충격이 심화되면서 감염위험이 높은 소위 ‘나쁜 일자리’ 조차 아쉬운 상황. 하지만 이를 방치해 생긴 빈곤의 연쇄는 ‘2차 대유행’ 가속화로 귀결될 수 있다. 건설현장 일용직으로 일하는 박영진(가명ㆍ45)씨의 가족도 위험과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 최근 수입이 줄면서 아들(15)과 원룸에서 고시원으로 이사하면서다. 고시원은 정부가 꼽은 감염 고위험 사각지대. 박씨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피하고 싶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그는 “건설일이 끊기고 주로 물류센터나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니 낮(일터)이나 밤(주거지)이나 코로나19가 두렵다”고 말했다.
정부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마련한 '한국형 뉴딜'을 통해 고용보험을 전국민 대상으로 확대하고 한국형 상병수당을 도입하는 등 사회안전망 확충을 약속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할 대책은 물론 기초 자료조차 미흡하다.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건강형평성연구센터장은 “정부의 확진자 역학조사에는 직업이 빠져있어 정확히 어떤 직종이 위험한지 파악이 안되고, 기존 근로환경조사를 기준으로 추정해도 콜센터나 물류센터는 고객 접촉이 없어 감염위험이 낮은 걸로 간주된다"며 “코로나19로 주춤했던 경제활동이 살아나는 과정에서 감염병 예방 관점의 산업안전대책이 마련돼야 집단감염을 막고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