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이냐, 보존이냐. '영원한 딜레마'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가 다시 한 번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집값 안정을 위한 주택공급 확충 방안으로 서울시 그린벨트 해제를 검토하고 있지만, 시는 "절대 불가"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죠.
지난 49년 동안 그린벨트는 개발과 보존이라는 상충된 가치를 놓고 양날의 칼처럼 다뤄져왔습니다. 그린벨트 해제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였던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해제될 가능성에도 무게가 실리고 있는데요. 그린벨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규모 개발사업이나 주택공급 문제를 두고 존폐의 위기를 맞고는 했죠.
고려·조선시대 '금산'(禁山)이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특정 지역을 정해놓고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었죠. 무분별한 벌목을 방지하고 비상시에 쓸 목재를 아끼고, 산사태를 예방하는 취지였습니다. 대상지가 전국 200여 곳에 달했고, 위반시 처벌도 이뤄졌다고 해요.
시간이 흘러, '금산'은 오늘날 그린벨트로 거듭납니다. 1960년대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인구가 서울로 몰리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1년 도시관리 선진국으로 꼽히는 영국의 그린벨트 제도를 본 따 그린벨트를 시행했죠. 서울의 과밀화 현상을 막고 도심의 자연 환경을 보전하기 위한 성장관리정책이었어요. 그린벨트 내에서는 건축물을 신·증축하거나 용도 변경, 토지의 형질 변경, 도지 분할 등의 행위를 제한했습니다.
최초의 그린벨트는 서울 광화문 일대 반경 15km 주변, 서울·경기에 속하는 454.2km² 지역이었습니다. 다음해 8월 지정 지역이 두 배(68.6㎢)로 확대됐고, 77년까지 총 8번에 걸쳐 전국 14개 도시권에 그린벨트가 만들어졌어요. 전 국토의 5.4%, 당시 서울의 8.9배에 달하는 규모였습니다. 박 전 대통령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했는지, 불같은 추진력에 해외에서도 한국의 그린벨트 제도가 성공 사례로 소개됐다고 해요.
문제는 그린벨트 대부분이 사유지라 주민들이 재산권 침해와 생활 불편을 꾸준히 호소했다는 겁니다. 당시 도입 결정 후 1년도 안 돼 졸속으로 시행에 나서게 된 건데요. 그래서 한 집에서 안방은 일반 구역, 화장실은 그린벨트 구역으로 묶이는 일도 속출했다고 해요. 환경보존의 가치만을 생각하느라 정작 그 안에 사는 주민들에 대한 배려는 부족했던 걸로도 볼 수 있겠죠.
군사독재 시절엔 국가 정책에 토를 달기 어려웠지만, 민주화 물결이 일면서 그린벨트 제도에도 반발하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났는데요. 금기시되던 그린벨트 완화를 건드리기 시작한 건 노태우 정부 때부터였어요. 전두환 정부도 그린벨트 해제를 검토했으나 논의에 그쳤었죠.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로 휴식 공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전국 30곳의 약 3.7㎢ 부지에 미사리 조정경기장, 과천 경마장시설, 태릉선수촌 등 생활체육시설 개발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조건 고수를 원칙으로 하던 이전과 달리 그린벨트를 제한적으로 활용하기로 한 겁니다. 일부 개발되긴 했지만,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에서 그린벨트는 전체 규모가 그대로 유지됐는데요. 90년대 부동산 투기 바람이 일면서 개발 이익을 노린 그린벨트 훼손이 본격적으로 벌어집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린벨트는 큰 변화를 맞게 됩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수도권 입지 규제 완화 등을 적극 추진한 겁니다. "과학적인 환경평가 실시로 보존가치가 없는 지역은 해제하고 보존이 필요한 지역은 국가가 사들이겠다"며 그린벨트 해제를 97년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까지 내걸었었죠.
김 전 대통령은 역대 정부 중 가장 많은 면적을 해제했습니다. 99년 당시 건설교통부는 7개 대도시권의 그린벨트를 부분 해제하고 개발 압력이 낮은 7개 중·소도시권역의 개발제한구역을 전면 해제하기로 했어요. 다음해 춘천·청주·전주 등 7개 중·소도시권 781㎢의 그린벨트가 해제됐고, 수도권·부산·대구·대전·광주 등 7개 대도시권은 343㎢ 총량 안에서 단계적으로 해제됐죠. 그 중에서도 특히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유명한 강원도에서 가장 큰 규모(294㎢)로 그린벨트를 해제했어요. 당연히 환경단체의 반발도 크게 일었죠.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칠 때도 그린벨트는 해제의 압박에 시달렸습니다. 노무현 정부는 국민임대사업과 잔여 중·소도시권 해제를 명목으로 그린벨트를 654㎢ 줄였어요. 특히 전북(225㎢)·경남(272.6㎢)에서 그린벨트가 가장 많이 해제됐습니다.
'녹색성장'을 내세운 이명박 정부는 보금자리주택 공급 정책을 위해 강남구, 서초구의 땅 88㎢를 해제했습니다. 박근혜 정부도 민간기업형 임대주택 '뉴스테이' 정책을 추진할 땅을 그린벨트를 풀어 마련했죠.
서울 집값 문제에 시달리는 문재인 정부도 그린벨트 해제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죠. 현재 서울에는 그린벨트가 19개 구, 총 150㎢ 규모로 형성돼 있는데, 가장 넓은 서초구(23.89㎢)를 포함해 강서구(18.92㎢), 노원구(15.90㎢), 은평구(15.21㎢), 강북구(11.67㎢), 도봉구(10.20㎢), 강동구(9.26㎢) 순으로 거론되고 있어요. 당장 주택 공급이 용이할 것으로 예상되는 강남권이 해제 1순위로 꼽히는 것이죠.
그린벨트 해제가 녹지를 훼손하고 땅값 상승만 부추길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는 계속 나오고 있어요. 김진애 열린민주당 의원은 지난 16일 MBC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서 "지금 서초구에 그린벨트가 조금 남아 있는데 대부분 이명박 시절에 털어서 보금자리 주택으로 했다"며 "남은 그린벨트를 해제하는 것은 강남 주택에 기름을 붓는 것"이라 지적했죠. 그린벨트를 해제하면 부동산에 다시 자금이 몰리고 폭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란 주장입니다. 존폐의 기로에 선 그린벨트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