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심 강한 맹꽁이처럼

입력
2020.07.17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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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이렇게 둘이서만 얼굴 보는 건 처음이죠?” 1층 카페로 내려가니 구석진 자리에 앉은 그가 보였다. 다가간 내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묻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죠. 15년 전에 헝가리 여행 다녀온 이후 그 무리 몇몇과 어울려 세 번인가 만난 게 전부예요.”

어떤 사람은 풍경으로 각인된다. 지금 내 앞에 앉은 이가 그렇다. 해지는 페스트의 성곽에 기대서서 다뉴브강 너머 구도시 부다가 노란색 불빛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감상하던 그 가을 저녁. 거기 있던 모든 이들이 신음에 가까운 탄성을 쏟아내던 순간에 누군가의 길고 긴 한숨 소리가 내 귀에 걸렸다. 뭔가 싶어 둘러보니 바로 옆에 선 사람이 내는 소리였다. 넋이 나간 채 미동조차 없는 모양을 보며 혼자 웃었다. 아마도 그는 깊은 감동을 한숨으로 표현하는 특이한 습성을 지닌 모양이었다. 그날 이후 며칠 더 여행이 계속됐지만 이렇다 할 이야기를 주고받은 기억은 없다. 낮에는 낮대로 기막히게 아름다운 그곳의 가을 풍광을 각자 눈에 담기 바빴다. 몇몇 젊은이들이 맥주와 와인을 곁들여 늦은 밤까지 담소를 즐기는 듯했지만 그 자리에 나는 끼지 못했다. 유독 잠이 많은 탓에 저녁을 먹자마자 숙소로 들어가 곯아떨어지기 바빴던 까닭이다. 어제 퇴근 무렵 불쑥 전화를 한 그가 인근을 지나가는 참이라면서 잠시 들러도 되겠느냐 물었을 때 흔쾌히 응낙한 건, 아마도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그 풍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삶에는 굳이 인과를 따져 물을 필요조차 없는 일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나는 이제 안다. 친하지 않은 사람과 마주 앉아 쓰잘데기 없는 말을 주워섬기는 기술 역시 시간이 알려준 지혜일 테다. 모처럼의 수다로 우울이 풀려갈 무렵, 우리는 자리를 옮겨 매운 코다리 조림으로 저녁 식사를 했다. 각자의 집으로 가기 위해 인근 아파트단지를 관통해 걷는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거 맹꽁이 울음소리 아녜요?” 도심 한가운데서 들려온 맹꽁이 소리가 무척이나 경이로운 듯했다. 나는 북쪽의 산과 그 능선을 타고 이어진 숲길을 가리켰다. “어느 모험심 강한 맹꽁이겠죠. 저기 낙차 큰 인공폭포를 지나고, 위험천만한 차도를 건너고, 아파트 사이사이에 조성된 산책로를 헤매는 대모험 속에서 살아남은 몇몇 녀석이 마침내 여기 작은 연못을 거처로 정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내 말을 듣던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때 헝가리에서 샀던 와인, 아직도 보관하고 있어요?” 말인즉, 그 여행 중 들렀던 포도농장에서 보헤미안 크리스털 병에 담긴 와인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섯 병이나 사던 내 모습이 그에게는 인상적인 풍경으로 각인돼 있다고 했다. 그 멋진 것들을 자기도 사왔어야 했는데, 찔끔 시음만 하고 돌아온 게 두고두고 아쉽다고.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거기 포도농장으로 가는 길을 지금껏 또렷이 기억한다는 그가 다시 물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작당해서 다시 한번 다녀오고 싶은 마음 굴뚝 같아요. 가능할까요?” 장마 후 빼꼼 나온 햇살처럼 소중한 순간들. 그 마음이 행여 구름 뒤로 숨어버릴까, 나는 냉큼 반문했다. “안 될 게 뭐예요? 세상사 아무리 살얼음판 같다고 한들, 저 맹꽁이의 모험만 하겠어요?” 15년 전 페스트 성벽에서 들었던 한숨 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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