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금 유용 논란에도... 내가 기부를 멈출 수 없는 이유

입력
2020.07.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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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노동자 김순각씨 33년째 아이들 위한 기부 지속
"돈 관리 철저해지고 일터에선 보람, 삶이 달라져"
2030은 직접 디자인 "극소수 비리로 후원 끊어서야"

기부는 선행이다.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만으로도 기부는 충분히 값어치 있는 행위다. 스스로 위안을 찾을 수도 있어 기부하는 사람도 보람이 크다. 다만 자발성을 전제로 한 행위라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지갑을 닫을 수도 있다. 최근 위안부 할머니들을 도와온 정의기억연대(정의연) 그리고 할머니들이 거주하는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불거진 후원금 유용 논란에, 선량한 기부자들은 '이 돈이 제대로 쓰일까’ 라는 근본적인 의구심을 품게 됐다. 급기야 일부 후원자들은 기부금 반환소송까지 제기하며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 사태로 주머니 사정까지 안 좋아지면서 기부금 감소 추세는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그럼에도 기부의 참뜻이 퇴색해선 안 된다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꾸준히 자기 돈을 꺼내놓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들도 정의연의 일탈이나 얇아진 호주머니 사정으로 한때 기부 중단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이들의 내린 결론은 '그래도 멈춰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기부가 다른 사람을 돕기 이전에 이미 자신들의 삶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었다. 30년 넘게 꾸준히 기부를 이어온 50대 자영업자도, 큰 돈은 없어도 여러 명이 십시일반으로 뭉친 젊은이들도, 여윳돈이 생길 때마다 기부처를 찾아 쾌척해온 40대 직장인도 한결 같았다. 기부자들을 맥 빠지게 하는 현실 속에서도 그들은 왜 나눔을 포기할 수 없을까.


‘적은 비용 큰 만족' 기부의 경제학

서울 여의도의 한 빌딩에서 청소일을 하는 김순각(56)씨는 20대 초 ‘친구 따라 춘천 갔다’가 우연히 아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군 제대 직후인 1987년 친구들과 춘천으로 여행을 갔다가, 친구의 강권으로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으로 끌려간 게 장기 후원을 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엔 본심과 다르게 강제로 서약했지만, 후원은 올해로 33년째 이어졌다.

김씨가 기부를 멈추지 않았던 이유는 경제적으로 가치 있는 행위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충동구매를 하게 되면 늘 후회가 뒤따르지만, 기부는 적은 돈을 쓰면서도 큰 만족감을 주는 가성비 높은 소비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돈 관리를 철저히 하도록 만든 것도 기부 습관이 준 혜택이라고 김씨는 말한다.

김씨가 그렇다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내가 ‘제발 쓸 때는 쓰자’고 말할 정도로 저는 인색한 사람입니다. 살면서 ‘외식하러 가자’고 가족에게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니까요.” 김씨가 이날 입고 온 등산복도 출시된 지 몇 년이나 지난 이월상품이었다.

그가 30년 이상 후원을 이어오고 있지만, 잠시 기부를 중단한 적이 있었다. 아무리 아껴도 주머니에 남는 돈이 없을 정도로 삶이 팍팍했던 때라고 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서 통장관리를 하며 꼼꼼히 재무상태를 살폈어요. 그랬더니 특별한 추가수입이 없었는데도 신기하게 두세 달 후에 매달 5만~10만원씩 다시 후원할 수 있게 됐어요.“ 결국 주머니 사정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기부를 이어온 원동력이었다고 그는 강조했다.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30년 전엔 경제적으로 녹록치 않았거든요. 기부금을 내면서 매달 3% 정도 지출이 늘었지만, 마음으로 느끼는 만족감은 그 이상이에요. "


기부를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도 형성

김씨는 기부가 이어준 새로운 인간관계를 통해 자신의 삶도 확 달라졌다고 말한다. 돈에 끌려 다니며 지내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물질에 대한 집착에서 훨씬 자유로워졌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10년간 후원을 이어온 현민(20ㆍ가명)이가 최근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며 김씨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을 때는, 정말 뿌듯했다고 한다. “자식 키운 듯한 보람을 느꼈어요. 후원이 없었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잖아요."

김씨는 “대학 진학 대신 일을 시작했다며 ‘그 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이 편지에 적혀 있었다"며 "사는 게 바빠서 후원아동의 이름조차 모른 채 돈을 보낼 때도 있는데, 감사편지까지 받으며 현민이의 앞길을 함께 생각하니 새로운 가족이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기부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을지 의심한 적이 없었을까. '기부 사기'로 회자되며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사건들을 보면서 김씨 역시 ‘내 돈이 엉뚱한 곳에 쓰이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희귀병에 걸린 딸의 치료를 위해 눈물로 호소해 모은 기부금으로 외제차 3대를 몰다가 아동 살인혐의로 검거된 ‘어금니 아빠’ 사건, 결손아동 후원을 위해 4년간 128억원의 기부금을 모아서 호화생활을 해온 ‘새희망 씨앗’ 사건 등 일부 파렴치한 사기 사건은 김씨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정의연의 기부금 유용 의혹이 불거졌을 때는 특히 그랬다. 김씨는 그러나 그런 고민은 잠시 뿐이었다고 했다. “수많은 단체 중에서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는 문제잖아요. 기부한 돈 가운데 10%라도 제대로 쓰인다면 기부는 여전히 의미있다고 믿고 있어요."

현민이가 독립하면서 김씨는 올초 여섯살 난 혜린(가명)이와 새로운 인연을 맺었다. 김씨와 연결된 4번째 어린이다. 그는 현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외에도 적십자회와 서대문구 이웃어르신을 위한 반찬봉사 모임 ‘가온길’에도 봉사와 후원을 하고 있다. 기부는 이제 그의 삶의 일부가 돼버렸다.


2030 챌린지, 기부도 디자인한다

2030 세대는 기부를 직접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든 40~60대에 비해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고, 취업준비에 매진하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지만, 스스로 옳다고 믿는 가치 앞에선 기부금 내기를 망설이지 않는다. 소비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싶은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만든 ‘기부챌린지’도 이런 맥락에서 시작됐다. 2014년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해 미국에서 시작된 '아이스버킷 챌린지'를 계기로 국내에서도 확산된 ‘챌린지’ 문화는 특정 행동을 한 뒤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인증하고 다음 주자를 지목해 확산시킨다.

여성 달리기 동호회 '필레이디'도 2년 전 기부챌린지 ‘위캔스피크(WE CAN SPEAK)’를 시작하면서 뭉친 케이스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인권운동가 이용수(92) 할머니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아이캔스피크(I CAN SPEAK)가 모티브가 됐다. 방식은 간단하다. 소녀상까지 6㎞를 함께 달려가서 소녀상의 의미를 생각하고 각자 부담되지 않는 수준의 돈을 모아 나눔의 집에 후원한다. 2018년엔 여성의 날인 3월 8일 전후 회원 150명이 챌린지에 동참해 304만원을 모았고, 지난해에는 200만원을 모아 나눔의 집에 보냈다. 올해도 이달 말 SNS에서 비대면 챌린지를 통해 세 번째 행사를 이어갈 계획이다.

그러나 후원대상인 나눔의 집에서 후원금 유용 의혹이 불거지자, '필레이디' 내부에서도 기부를 지속할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었다. 회원 김선화(32)씨는 “비록 큰 돈은 아니지만 150명의 마음을 모은 돈인데 엉뚱한 곳으로 흘러갔다는 보도를 보고 매우 화가 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부의 취지 자체를 훼손하지 말자는 의견이 주를 이루면서 ‘챌린지’는 지속됐다. 회원 신유진(33)씨는 “허탈하기도 했지만, 할머니들께 힘이 되고자 하는 본래의 마음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기부를 이어가자고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나 꾸준히

2010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은 소득과 행복도는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인 45만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연봉 7만5,000달러(8,000만원)까지는 소득이 늘수록 대체로 행복도도 증가하지만, 이를 초과하면 더 이상 행복해지지 않았다. 인간의 행복지수는 돈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게 연구의 요지였다. 앵거스 디턴은 돈 이외에 행복을 결정하는 요인까지는 제시하지 못했지만, 기부를 실천해온 사람들은 기부가 해답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 후원금으론 명함도 못 내민다”며 겸손해하는 변호사 이상민(40)씨도 기부가 행복을 배가시킨다는 데 동의하는 사람이다. 그는 부담되지 않는 금액이 오히려 지치지 않고 오랜 기간 기부를 이어가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말한다. “후원을 시작하기보다 끊는 일이 훨씬 어려워요. 후원자 한 사람, 단돈 만원이 아쉬운 기부처 입장에선 후원자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가장 기운 빠지는 일이거든요.”

이씨는 그래서 평소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단체 중에서 후원금을 조금이라도 더 필요로 하는 곳을 기부 대상으로 고른다. 이씨에겐 높은 보수를 마다하고 인권분야에서 활동하는 법률단체가 주요 기부 대상이다. 변호사 일을 하다 보니, 어떤 법률단체가 신뢰할 수 있는지는 금새 알 수 있어, 고민 없이 후원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곳에선 의미 있는 일에 돈을 쓰겠다’는 확신이 들면 기부를 하게 되지만, 때로는 마음내키는대로 돈을 내놓기도 한다. '좋은 일 하고 있는 분들에게 양념닭갈비 정도는 사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5만~10만원을 보내는 식이다. 술과 담배를 하지 않으니 담뱃값이라고 생각해 돈을 보내기도 하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많은 운이 따라줬고 비교적 좋은 환경에서 살아왔으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탬이 되자’고 생각해 100만원 단위로 쾌척한 적도 있다.

자신의 생일과 어머니 기일 등 지극히 개인적인 날에도 평소 마음에 두고 있던 단체에 기부금을 보낸다. 지난해 8월에는 나눔의 집에, 12월에는 장애인권을 위한 매체 비마이너에 각각 100만원을 후원했다. 이씨는 올해 5월엔 어머니 기일에 맞춰 성당에 기부했다.

지난해 13세 이상 국민 3만7,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기부하지 않는 이유로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51.9%) 또는 ‘기부에 관심이 없어서’(25.2%) 그리고 ‘기부 단체 등의 불신’(14.9%) 등을 꼽았다. 그러나 기부처나 방법을 몰라 실행에 옮기지 않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씨는 가까운 곳에서 기부처를 찾았다. 2014년 소속 로펌에서 공익활동을 위해 만든 재단법인 동천에 관심을 두면서 기부금액을 늘리게 됐다. 재단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재정관리가 투명한지 가까이에서 봐온 그는 그해 5월 어머니 장례를 치른 뒤 조의금 중 200만원을 동천에 기부했다. 이후 가까운 지인들을 통해 활동내용을 알게 된 공익인권법센터 공감과 이주민지원공익센터 감사와동행,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난민법센터 어필(APIL), 재단법인 진실의 힘에 정기후원과 비정기후원을 하고 있다.

이씨는 100만원 단위로 기부하면, SNS에 기부 내역을 포스팅한다. 지인들이 그것을 보고 각자 형편대로 기부에 동참해준다면 자연스럽게 기부문화가 확산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누군가 한 달에 만원만 보내도 후원 받는 입장에선 그 이상의 힘이 납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인정을 받은 셈이니까요. 그래서 앞으로도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고 꾸준히 기부할 생각입니다.”

박지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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