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 클레의 그림이 있다. 앙겔루스 노부스라고 하는. 천사 하나가 그려져 있다. 자기가 응시하는 곳으로부터 막 떠나려는 모습으로. 그의 눈은 째졌고, 입은 벌어졌고, 날개는 활짝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아마 이런 모습이리라. 그의 몸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거기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에서 그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폐허 위에 폐허를 쌓으며 그것들을 그의 발 앞에 내던지는 파국을.”
비평가 발터 벤야민의 '역사에 관하여'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글은 1940년 파리에서 작성됐다. 이 글을 쓴 직후 파리가 독일군에 점령당한다. 미국으로 망명하려면 스페인 국경을 넘어야 했지만, 유태인이었던 그는 국경에서 입국을 거절당한다. 프랑코 총통 하의 스페인은 당시 나치 독일과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결국 묵고 있던 호텔에서 다량의 아편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글에 언급된 그림은 벤야민이 1921년 화가에게서 직접 구입했다고 한다. 그 후 알 수 없는 경로로 친구인 거숌 숄렘의 손에 넘겨져, 지금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벤야민은 저 천사를 자신과 동일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에 대한 그의 해석에는 역사를 바라보는 그의 멜랑콜리한 시각이 담겨 있다.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는 그 자리에 머물러 죽은 자들을 깨우고 패한 자들을 모으려 한다. 하지만 낙원으로부터 한줄기 폭풍이 불어와 그의 날개에 부딪히고, 그 바람이 너무 강해 그는 날개를 접을 수가 없다. 그 폭풍이 그를 등 뒤의 미래로 날려 보내는 사이에, 그의 눈앞에서 폐허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만 간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리라.”
천사는 낙원으로 날아가려 하나, 거기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이 그를 낙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그 바람이 ‘진보’라는 것이다. 숄롐에 따르면 이 글은 스탈린-히틀러 동맹(독소불가침조약)의 충격과 좌절 속에서 쓰였다고 한다. 자신이 신봉하는 공산주의가 자신이 증오하던 파시즘과 손을 잡았으니 세계가 무너지는 느낌이었으리라. 그 파국을 바라보는 멜랑콜리(우울)가 글에서 그대로 배어난다.
요즘 비슷한 심경을 느끼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진보’라는 이름의 광풍이 우리를 더 나은 세상으로 데려가는 게 아니라, 외려 그곳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한다는 느낌. 그 자리에라도 있고 싶어도 바람이 너무 거세 날개를 접지 못한 채 계속 뒤로 밀려나는 느낌. 사실 20년 전에도 이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다. ‘진보’가 승리했다는 지금이 외려 그때보다 우리가 가려고 했던 사회로부터 더 멀어진 느낌이다.
역사의 천사는 ‘진보’라는 바람에 실려 날아가면서 눈앞에 폐허가 산처럼 쌓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우리도 그동안 비슷한 광경을 봐 왔다. ‘진보’의 광풍이 공정과 정의를 무너뜨려 사회를 논리와 윤리의 폐허로 바꾸어 놓는 파국의 드라마. 이번에 정말로 거대한 파국을 맞았다. 그 주인공은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 상황은 내게 비현실적이다. 대체 왜 그랬을까.
여성을 위해 그보다 더 헌신적이었던 남자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는 1980년대 권인숙 성고문 사건의 변론으로 사회에 이름을 알렸다. 1993년에는 성희롱을 당한 우 조교의 무료 변론을 맡아 6년의 긴 소송 끝에 승소를 이끌어냈다. 그 덕에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되던 ‘성희롱’이 이 사회에 심각한 범죄로 등록될 수 있었다. 2002년에는 우근민 제주지사 성추행 사건의 민간진상조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1년 서울시장이 된 후 그는 서울을 “여성행복특별시”로 만들기 위해 친여성적 정책을 폈다. 지금도 성평등 정책에서 서울시는 전국의 지자체들 중 가장 앞섰다고 평가된다.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캠프를 “성평등 선거캠프”로 꾸렸다. 시청 안에는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담당하는 부서를 설치했다. 그는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눈물을 흘렸고, “저는 사실 여성”이라고 수줍은 고백을 하기도 했다.
성폭력 피해여성을 지켜주는 인권변호사, 참여연대를 설립해 주도한 시민운동가, 혁신적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행정가로서 그가 남긴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최장수 서울시장임에도 불구하고 남긴 것이라곤 빚 밖에 없을 정도로 청렴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내게 그는 운동의 헌신성의 상징이자 진보의 순수성의 증명이었다. 그래서 그의 몰락이 내게는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진보 전체의 죽음으로 느껴진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이가 하필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했다. 공들여 써온 삶의 서사가 일거에 무너진 것이다. 그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 아니면 성추행을 성추행으로 인지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즉 그의 한계가 그의 개인적 한계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위선은 우리 세대의 위선이고, 그의 어리석음은 곧 우리 세대의 어리석음이다.
그동안 우리는 ‘진보’를 표방해 온 한 세대의 위선과 어리석음이 이 사회를 폐허로 만드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나 또한 그 세대에 속하기에 그들의 위선에서 나 자신의 위선을 보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이 또한 나 자신의 어리석을 깨달았다. 그를 보내는 것은 그와 우리가 공유하는 이 위선과 어리석음을 떠나보내는 과정이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실패한 곳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그의 죽음마저도 비판했어야 한다. 그의 자살은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었다. 유서에서도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이에게는 사과의 말을 남기지 않았다. 그의 큰 삶에 비해 보잘것없는 삶을 살아온 우리는 그의 위선과 어리석음을 우리 것으로 끌어안고 그와 함께 비난을 받았어야 한다. 아울러 그의 무책임에 책임을 지기 위해 그가 버려두고 떠난 피해자를 지켜줬어야 했다.
하지만 진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외려 그에게 성대한 장례를 치러주었다. 피해자는 “5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 앞에서 좌절감을 느꼈다고 했다. 여기서 50만은 ‘서울시장(葬) 반대 국민청원’에 서명한 이들의 숫자다. 성추행으로 고통받고 가해자의 죽음으로 다시 고통을 받아야 했던 피해자. 저 성대한 장례식으로 인해 그는 또 다른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있었던가.
장례를 우아하게 치르기 위해 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피해자’를 ‘피해호소여성’으로 바꿔 불렀다. 이 해괴한 표현을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이어받았다. 마지못해 낸 민주당 여성의원들의 성명에도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여성운동의 대모’라 불리는 이도 포함되어 있다. ‘피해자’가 사라지면 ‘가해자’도 사라진다. 실제로 있었던 성추행은 사실의 영역을 떠나 미지의 영역으로 실종된다.
박원순을 위해 성추행 피해자의 지위는 ‘피해호소여성’으로 변경됐다. ‘피해호소여성’이라는 표현은 곧 ‘나는 너의 말을 믿지 않겠다’는 결연한 집단적 의지의 표명이다. ‘성추행은 너의 주관적 주장일 뿐 아직 사실로 확인된 게 아니다. 우리가 사실로 인정하는 것은 그저 네가 성추행 피해를 호소하고 다닌다는 것뿐이다.’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성추행 피해자를 ‘피해호소여성’이라 불렀던가.
박 시장은 늘 피해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곤 했다. “성희롱이냐, 아니냐의 판단은 피해자 관점에서 봐야 한다.” ‘피해자 중심주의’의 원칙을 세우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도 그였다. 93년 우 조교 사건 때 그는 법정에서 ‘피해자’가 느끼는 수치심을 성희롱의 기준으로 관철시켰다. 그렇게 그가 애써 세워놓은 원칙을 그들은 그를 위해 무너뜨렸다. 그로써 그가 이 세상에 다녀간 흔적마저 지워졌다.
그들이 치러준 성대한 장례식이 그에게는 또 다른 죽음이었다. 그를 위한답시고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평생에 걸쳐 없애려 했던 그 짓을 골라서 하고 있다. 성추행 폭로자의 배후를 의심하고, 피해자를 꽃뱀으로 매도하며, 열심히 피해자와 그 주변의 신상을 캔다. 이를 위해 날조와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그가 쌓아온 업적을 그의 지지자들이 무너뜨린다. 이보다 더 완벽하게 그를 죽일 수 있을까.
도대체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이 저 숭고한 사명감으로 얼마나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저러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가 세우려는 이상세계는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 이미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거꾸로 저들이 보여주는 저 광적인 열정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구축하게 될 세상의 모습을 미리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짓는 아방궁에서 나는 그저 거대한 폐허, 완벽한 파국만을 볼 뿐이다.
그림으로 돌아가자. 천사의 머리는 몸통과 날개를 합친 것보다 크다. 세상을 움직일 힘 없이 머리만 비정상적으로 자란 지식인의 상징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진보’라는 광풍에 떠밀려 날아가며 눈 앞에 펼쳐지는 파국을 놀라서 벌어진 입으로 그저 응시하는 것뿐이다. 베냐민은 아직 메시야라도 기대할 수 있었지만, 이 빌어먹을 시대는 우리에게 메시야의 희망마저 허용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