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 바닥이 둥둥 뜬 집, 깊은 빛우물을 만들어내다

입력
2020.07.15 04:30
18면

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10m에 달하는 높은 천창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맨 꼭대기에서 하늘을 보며 목욕할 수 있는 집이, 빽빽하게 들어찬 도시에서 가능할까. 지난해 12월 완공된 부산 수영구 민락동의 주택 ‘정, 은설(井, 銀雪)’은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집이다. 설계를 맡은 정영한 건축가(정영한아키텍츠 대표)는 “채광이나 환기 같은 기본 요건을 갖추면서도 거주자가 빛이나 자연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내밀한 경험의 가치를 제공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유하는 9개의 바닥들

서울에서 맞벌이 생활을 했던 정슬기(36)ㆍ설윤형(33)씨 부부는 고향 부산으로 이주하면서 두 아이와 반려견을 위해 집을 짓기로 했다. 젊은 부부는 “아파트가 편리하긴 했지만 답답하고 지루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며 “아이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층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선 해운대 일대에서 떨어진, 오래된 구도심의 땅을 골랐다. 땅값이 비교적 싸기도 했지만 뻔하지 않은 풍경, 번잡하지 않은 동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설계는 남편 정씨가 대학 때부터 오랜 친분을 쌓아온 정영한 건축가에게 의뢰했다.

부부의 요구는 간결했다. ‘임대 없이 가족이 오롯이 쓸 수 있는 집’, ‘환기가 잘 되고 답답하지 않은 집’이 전부였다.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우리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요구하면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의 집이 나올 것만 같다"는 생각에 최대한 요구를 자제한 것. 2013년 평면을 9개로 쪼갠 ‘9X9주택’을 선보였던 정 건축가의 실험은, 그래서 가능했다. 그는 “도시주택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집 안에서 남다른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며 “시공간의 변화에 따라 거주자가 능동적으로 만드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래된 주택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집(대지면적 152㎡ㆍ45.98평)은 폐쇄적이다. 북향인 정면은 밖에서 보면 남서향으로 낸 고창만 빼곤 다 벽이다. 알루미늄 재질의 네모 반듯한 박스 형태로 지어뒀으니 바깥에서는 층수조차 가늠이 안 된다. 건축가는 “집 앞 도로를 빼곤 다른 주택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가족들의 사생활 보호를 위해 외관은 폐쇄적으로 마감했다”고 말했다.



내부는 반전이다. 2층부터 시작되는 집 내부는 바닥부터 10m 높이의 천정까지 시원하게 뚫려 있다. 그 사이로 9개의 바닥이 나선형 구조로 연결된다. 마치 우주선처럼 바닥들이 공중에 둥둥 떠있는 모양새다. 2.3~3.8m 정도로 제각각 높이가 다른 바닥들이어서 이 바닥들 하나하나가 벽 없는, 문 없는 방이다. 2층에서 한 단을 오르면 두 아이의 놀이공간이, 다시 한 단을 오르면 두 아이의 침실이, 침실을 돌아 다시 한 단을 오르면 부부의 작업실이, 그리고 다시 한번 돌아 오르면 외부 테라스가, 그리고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공간의 맨 꼭대기에는 부부의 침실과 가족의 목욕실이 나타난다. 각 공간마다 벽 대신 높이 1m 안팎의 유리창이 둘러쳐져 있다. 고창과 천창으로 들어오는 빛과 소리, 풍경이 내부 유리창을 통해 그대로 들어온다.




이렇게 열린 공간이다보니 2층 주방과 화장실, 테라스, 그리고 꼭대기 목욕실을 빼곤 모든 공간에 딱 정해진 용도가 없다. 1층 주차장과 남편 정씨가 골프 등을 할 수 있는 취미공간도 마찬가지다. 폴딩도어(접이식 문)를 활짝 열면 마당처럼 쓸 수 있도록 했다. 건축가는 “물리적인 벽과 문으로 구분됐던 예전 방식으론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수 없다”라며 “스스로 공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물리적인 경계 자체를 없앴다”고 설명했다.

주방이나 아이들의 놀이공간에서 부부의 침실이 보이진 않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다. 부부 침실과 아이들 침실을 수직적으로 놓아서 시야를 가렸다. 부부 침실에서 테라스 등을 볼 수는 있지만, 현관이나 2층 안쪽은 볼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건, 가족의 필요와 가구 배치에 따라 모든 공간이 서로 다 바뀔 수 있다. 부부는 “아이가 좀 더 크면 각자의 공간이 필요할 텐데 그땐 공간을 어떻게 쓸 지 수시로 상상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우물 정(井)자처럼 9개로 나뉜 공간에다 아이들 이름 한 글자씩 따다 붙인 집 이름 ‘정, 은설’은 그런 의미를 품고 있다.



빛, 소리, 풍경을 거주자가 조절하는 집

집은 빛과 풍경을 만나 더 풍요로워진다. 천창과 고창으로 쏟아지는 빛은 집의 바닥까지 깊숙이 들어와 빛 우물을 만든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 우물이다. 창마다 전동 블라인드를 달아 빛을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건축가는 “외부에서 보면 창이 적어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흐름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2층 바닥에서 높이 4m쯤 되는 지점에는 두 면이 연결된 고창이 있다. 외부 시선은 차단하면서 풍경은 누린다. 계단을 따라 오를수록 보이는 풍경은 점차 확대된다. 부산 앞바다도 보인다. 높낮이가 서로 다른 바닥에서 보는 풍경은 모두 다르다. 2층에서는 하늘에 둥실 뜬 구름이 보이고, 꼭대기에 있는 부부 침실에서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눈길을 끈다.

남편은 2층 바닥 빈 백(천 안에 작은 충전재를 채워 넣은 신축성이 좋은 의자)에 누워 가만히 하늘을 볼 때가, 아내는 꼭대기 욕실에서 아이들이 햇볕 아래 목욕할 때가 가장 좋다고 했다. 건축가는 “이런 내밀한 경험은 건축가가 의도하지 안은, 거주자 스스로 찾은 ‘사적 가치’다”고 말했다.



높이 10m에 달하는 수직적 공간이 주는 불편함은 없을까. 부부는 “처음에는 동선에 적응을 못해 물건을 하나 가지러 가는데도 여러 번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지만, 지금은 우리 스스로 알맞은 동선을 찾았다”고 말했다. 아침에는 일어나 씻고 짐을 챙겨서 아래로 내려와 주방에서 밥을 먹고 나가고, 저녁에는 반대로 저녁식사를 하고 아이들을 씻겨 재우고 침실로 올라오는 식이다. “이게 집이냐”며 난색을 표했던 양가 부모들도 지금은 “리조트에 온 것 같다”며 좋아하신다.




공간만큼이나 젊은 부부의 삶의 방향도 시시때때로 달라질 터. 아이들도 빠르게 커간다. 언제까지 살 생각이냐는 질문에 부부는 집의 수명은 집의 가치에 달렸다고 얘기했다. “10억원짜리 집에 살면 10억원의 가치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서울의 아파트가 그렇게 비싼데도 그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게 현실이잖아요. 여기서는 매일 마주하는 풍경이 다르고, 쓰는 공간이 달라지니 아이들이 매일 새 집에 사는 기분이 든다고 해요. 그런 가치들은 값으로도 매길 수 없는 게 아닐까요.”





부산=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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