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12일 박원순 서울시장과 백선엽 장군의 죽음, 조문을 둘러싸고 극단으로 갈라졌다. 미래통합당은 박 시장 조문 대신 성추행 의혹을 정치쟁점화하려는 태세고, 더불어민주당은 뒤늦게 피해자 보호를 언급하면서도 박 시장 업적론을 앞세워 물타기를 시도했다.
지난 10일 별세한 백선엽 장군 현충원 안장을 둘러싸고도 정치권은 쪼개졌다. 야당은 6ㆍ25 전쟁영웅 공로를 부각시키는 데 반해 진보 진영에선 그의 친일 행적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정치권이 사안의 공과(功過)를 차분히 짚어 숙의를 만들어내기보다 조문정치 이해득실 따지기와 이념 공방에 함몰됐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오후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백선엽 장군의 빈소를 찾았다. 하지만 박 시장 빈소 조문 계획은 아직 잡지 않았다. 김 위원장은 백 장군 빈소에서 기자들과 만나 "박 시장의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인간으로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면서도 "(조문 여부 등) 그밖의 사항은 여러분이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하면 된다"고 말했다. 사실상 조문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동시에 통합당에선 박 시장의 죽음을 대여 공세의 한 축으로 삼으려는 조짐이 보였다. 오는 20일 열리는 김창룡 경찰청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등을 통해 박 시장 성추문 고소 건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권영세 의원은 “박 시장 사건은 진실 규명을 위한 수사 필요성이 더욱 크다”고 했다. 통합당 의원 48명은 이날 공동성명을 내고 박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 보호가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박 시장 성추행 의혹은 외면한 채 고인의 명예를 지키려고만 한다'는 시민사회와 야당의 비판을 의식한 듯 추모 일변도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섰다. 장례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인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이날 브리핑에서 “피해 호소인을 압박하거나 가해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강훈식 당 수석대변인도 전날 “(성추행 의혹 제기자에 대한) 무분별한 신상 털기와 확인되지 않은 사실의 유포가 잇따르고 있는데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시장 공은 공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기류는 여전하다. 11일 빈소를 찾은 김경수 경남지사는 “언론에서 보도되는 피해자가 누군지 모르고, 사실관계도 전혀 모르지만,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똑같은 이유로 박 시장께서 평생을 바쳐 이뤄왔던 시민ㆍ인권운동 등의 업적 또한 충분히 추모할 가치가 있다”고 했다. 민주당은 서울 곳곳에 ‘박원순 시장님의 안식을 기원합니다. 님의 뜻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문구를 적은 추모 현수막을 내걸었다.
민주당의 이런 이중 태도는 여성ㆍ진보진영 등 친여 성향 여론마저 대체로 민주당에 비판적인 흐름을 의식한 결과로 보인다. 특히 이해찬 대표가 박 시장 장례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기로 한 것을 두고도 ‘성추행에 연루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집권여당 대표가 특별히 예우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정치권은 백선엽 장군의 죽음을 두고도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통합당은 여권의 박 시장 조문 분위기와 비교하며 '백 장군 홀대론'을 내세웠다. “민주당 일각에선 대한민국의 영웅을 친일파로 매도해 국민 통합을 저해하고 있다”(하태경 의원), “오늘날 대한민국과 국군을 만든 구국의 전사를 서울현충원에 모시지 않으면 누구를 모셔야 하느냐”(김은혜 대변인) 같은 주장이 나왔다.
반면 정의당은 백 장군이 조선독립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세워진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한 점을 거론하며 대전현충원 안장 방침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민주당은 그의 친일 행적을 의식한 듯 어떤 공식 입장도 내지 않았다. 다만 이해찬 대표와 정세균 국무총리,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등 여권 핵심 관계자들이 백 장군의 빈소를 잇따라 찾아 예를 갖추는 모습이었다.
특정인의 죽음을 두고 정치권이 극단으로 갈리는 모습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죽음과 조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도 커지고 있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치라는 건 극단을 메워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정치권은) 타협의 여지가 없고 정답이 정해져 있다”며 “우리편이면 다 맞고 상대편이면 다 틀렸다는 식의 선악 구분 정치만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익명의 한 정치학 교수는 "지금 정치권의 조문정치는 죽은자가 아닌 살아남은 정치인을 위한 행사"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