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선엽 장군이 10일 오후 11시 4분쯤 향년 100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는 6·25 한국 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웅으로 불렸으나 친일 논란 꼬리를 결국 떼지 못했다.
11일 육군 등에 따르면 백 장군은 1920년 평남 강서 태어나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해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국군에 입대했는데 국군 제5연대장과 육군본부 정보국장을 거쳐 6·25 전쟁 때 1사단장을 지냈다. 이후 1960년 예편 전까지 1군단장, 육군참모총장, 휴전회담 한국 대표, 합참의장 등을 지냈다.
1960년 5월 대장으로 전역한 뒤엔 주중 한국대사와 교통부 장관 등을 지냈다. 교통부 장관 시절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 건설을 도맡았다.
백 장관은 6·25전쟁 중 낙동강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1951년에는 동부 전선을 지키는 등 주요 전투를 지휘한 공로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 장군은 33살이던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4성 장군으로 진급했다.
낙동강 다부동 전투는 백 장군 스스로 꼽은 가장 치열했던 전투다. 1950년 여름 1사단장으로 당시 전투는 이끈 그는 당시 도망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내가 앞장서 싸우겠다. 만약 내가 후퇴하면 나를 먼저 쏘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두 달 가까이 부하 장병들과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전투 현장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백 장군의 친일 논란은 최근까지 이어졌다. 그가 청년 시절 일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이력 때문이다. 그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명단에도 이름이 올랐다.
현충원 안치 공방이 벌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5월 당시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친일파 군인의 죄상은 전공만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지적했는데, 이에 원희룡 제주지사는 "백 장군은 6·25의 이순신"이라며 반박했다.
백 장군의 장지는 대전현충원으로 정해졌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는 서울현충원 장군 묘역이 꽉 찼기 때문에 대전현충원으로 가게 된 것이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30호실에 마련되며, 발인은 15일 오전 7시다. 육군은 이날 오전 7시 30분 서울 아산병원에서 백 장군의 영결식을 육군장(葬)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오전 11시 30분 백 장군은 국립대전현충원 제2장군 묘역에 안장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