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보가 전해진 10일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애도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민주화 운동을 하며 40년을 함께한 오랜 친구”(이해찬 대표), “서울시 발전을 위해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김태년 원내대표), “참담하다”(김상희 국회부의장) 등 고인을 기리며 비극적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발언이 넘쳐났다.
하지만 민주당은 박 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로 지목된 ‘서울시 비서 성추행’ 의혹에 대해선 “예의가 아니다”며 침묵했다. 야권과 시민사회에선 “민주당이 피해자는 무시하고 박 시장을 미화하려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이해찬 대표는 박 시장 빈소에서 취재진이 ‘성추행 의혹이 불거졌는데 당 차원에서 대응할 계획인가’고 묻자 “그건 예의가 아니다. 그런 것을 이 자리에서 예의라고 (질문)하느냐”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서 “최소한 가릴 것이 있고”라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대표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취재진을 한동안 노려보기도 했다.
박 시장은 2018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됐고, 여권의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됐다. 박 시장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민주당이 공당으로서 입장을 밝힐 정치적 의무가 있다는 지적이 무성하다. 더구나 이번 의혹의 골자가 박 시장이 시장 지위를 악용해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것인 만큼, 박 시장의 사생활 문제라고 볼 수도 없다.
빈소를 찾은 다른 민주당 의원들도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법적으로 ‘공소권 없음’으로 정리됐다” “가신 분의 명예를 존중하는 게 도리” 등의 논리를 내세워 말을 아꼈다. 이날 오전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도 민주당 지도부는 성추행 의혹에 대한 당 차원의 사실관계 파악이나 대응 방안 등을 논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민주당의 태도는 지난 4월 민주당 소속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 때와 사뭇 다르다. 오 전 시장이 부산시 직원을 집무실로 불러 성추행한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하자, 이해찬 대표는 곧장 “피해자분과 부산시민, 국민에게 당 대표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인 바 있다.
민주당은 이번엔 박 시장의 명예를 보호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집권여당으로서 국민의 한 사람인 피해자를 위로하는 것에도, 의혹 진상 규명과 대책 마련으로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것에도 신경쓰지 않고 있다. 성추행을 견디다 경찰에 박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가 존재하는데도, 민주당은 그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다는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김기현 미래통합당 의원은 “성추행 고통도 모자라 고인의 죽음에 대한 고통까지 고스란히 떠안게 될 피해자가 우려된다”며 “세상이 고인의 죽음을 위로하고 그의 치적만을 얘기하는 동안 피해자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홀로 감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꼬집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고인께서 얼마나 훌륭하게 살아오셨는지 다시금 확인한다. 그러나 저는 피해자 당신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조문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도 빈소에서 성추행 의혹에 대한 질문을 받고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아주 엄숙한 분위기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