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일 있었던 러시아 개헌투표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개헌 결과에 따라 현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2036년까지 장기 집권할 가능성이 열리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결과는 투표자 77.9%의 찬성으로 개헌안 통과였다. 예상했던 바대로다. 투표 결과를 두고 한국 언론들은 푸틴의 '종신집권'의 길이 열렸다고 앞다투어 보도했다.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한 지도자가 무려 32년을 통치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이번 러시아 국민들의 선택은 우리의 눈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여기서 러시아 국민들의 낮은 민주주의 의식을 논하기보다는 어떻게 이러한 결과가 가능하게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 개헌과 관련하여 "왜 러시아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좋은 질문이다. 러시아는 표면적으로는 한국과 거의 비슷한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국민 직접투표에 의해 선출되는 대통령이 국정의 책임을 지는 대통령제이고,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가 3권 분립되어 있다.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에 의해 각기 절반씩 구성되는 의회(국가두마)가 존재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연방제인 러시아에서 연방 주체마다 2명씩 뽑아 올리는 상원(연방평의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이다. 우리네 정치발전 경험에 비교해 볼 때, 왜 같은 체제, 다른 결과가 나오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러시아 정당정치 구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도 여느 나라처럼 복수의 정당을 가지고 있다. 소련 시절 그 유명했던 '공산당 일당 독재'는 1990년 고르바초프 개혁의 일환으로 포기되었고, 이후 여러 정당들이 탄생하였다. 소련공산당은 러시아연방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아직까지도 정당으로 건재하다. 이 외에도 군소 정당이 다수 존재하니, 1990년대는 그 이름을 다 적기가 힘들 정도였다. 한편 러시아 정당정치의 주된 특징으로 정부와 연계된 소위 '집권당'의 존재를 들 수 있다. 1990년대의 우리집러시아당이 그러했고, 2000년대의 통합러시아당이 그러한 정당이다.
따라서 '집권당'이 원내 1당으로 의회 권력을 장악하는지 여부에 따라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옐친 대통령 시절에는 집권당이 아니라 공산당이 총선에서 승리하였기에, 공산당을 주도하는 의회가 나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며 행정부를 견제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통합러시아당이 2003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이 되자 의회와 행정부의 관계는 견제가 아니라 협력으로 바뀌게 되었다. 통합러시아당이 이후의 모든 총선에서 승리하였기 때문에 이 협조 관계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상당 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회의 행정부 견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러시아 국가두마는 이번 개헌 과정에서 기대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통합러시아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푸틴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지지,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두마 450석 중 337석을 차지하여 전체 의석의 75%에 달하는 통합러시아당은 개헌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하였다. 여기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었다. 제1 야당인 공산당과 다른 원내 정당의 의석을 합쳐본들 통합러시아당 세력에 견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방평의회도 통합러시아당이 장악하고 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통합러시아당은 지방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어 거의 모든 지방의회를 장악하고 있다. 주지사 및 시장 등 거의 모든 지역 단체장들이 통합러시아당 소속이다. 따라서 각 지역에서 뽑아 올리는 상원들은 친여 성향의 인물들이다.
이처럼 푸틴은 통합러시아당이라는 거대여당을 통해 중앙 및 지방정치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제도권 정치 영역에서 야권 세력은 거의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푸틴을 비판하고 그에게 도전할 수는 있으나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가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 국민들의 '합리적' 선택은 무엇일까? 이번 개헌투표가 보여주듯이, 이들은 예라고 답하는 것 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