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인생 '미션'은 '시네마 천국'이었다

입력
2020.07.1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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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일 세상을 떠난 엔니오 모리코네

편집자주

영화도 사람의 일입니다. 참여한 감독, 배우, 제작자들의 성격이 반영됩니다. <영화로운 사람>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가 만나 본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의 삶의 자세, 성격, 인간관계 등을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의 면면을 되돌아봅니다.


2015년 어느 여름날 스페인 부르고주 황무지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몇 년 동안 자신들이 추진해 온 숙원사업의 완결을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황무지는 1966년 영화 ‘석양에 돌아오다(The Good, the Bad, the Ugly)’가 촬영된 곳이었다. 황금을 찾아 아귀다툼을 벌이던 세 주인공이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 장소로 영화 속에선 ‘새드힐 묘지’로 묘사됐다. 세 사람이 서로 총을 겨누는 새드힐 묘지 장면은 영화 팬들 사이에서 영화사의 명장면 중 하나로 종종 소환된다. 

영화를 위해 조성된 새드힐 묘지는 촬영 후 잊혀졌다. 인적이 무척 드문 장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가짜 무덤과 묘비 등도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됐다.

세월이 한참 흘러 ‘석양에 돌아오다’의 한 스페인 광팬이 ‘새드힐 묘지’ 촬영지를 찾아 나섰다. 영화 속 원형을 잃은 모습을 보고 복구 운동을 주도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동참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자 영화 팬들이 손을 보탰다. 스페인 팬들은 삽 등을 들고 주말에 자원 봉사하듯 복구공사에 나섰고, 스페인 밖 팬들은 복구비에 쓰라며 돈을 보냈다. 유명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의 리더 제임스 헷필드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황무지는 영화 속 모습대로 49년만에 복원됐고, 팬들은 이곳에 모여 ‘석양에 돌아오다’를 관람했다. 영화 주인공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감사와 축하 인사를 담은 영상물을 보냈다. 팬들은 황무지를 새드힐 묘지라 다시 명명하고 스페인 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했다.

유난스러운 영화팬들의 과도한 덕질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석양에 돌아오다’는 개봉 당시 신드롬에 가까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제작비 120만달러에 불과한 이 영화는 북미 극장에서만 2,51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그저 그런 배우였던 이스트우드는 할리우드 톱스타가 됐다. 

‘석양에 돌아오다’는 주류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었다.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웨스턴이지만 제작 주체는 세르지오 레오네(1929~1989) 감독 등 이탈리아 영화인들이었다. 이들은 존 웨인으로 대변되던 정통 웨스턴과 달리 정의롭지 않은 주인공을 내세운 변종 장르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할리우드에 파란을 일으켰다.


아마 국내에서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이 영화의 음악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눈을 감고 ‘석양에 돌아오다’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말을 타고 황야를 달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어떤 대목에선 고독한 총잡이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힘겨운 삶에 깃든 유머를 맛보게도 된다. 지난 6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영화음악감독 엔니오 모리코네의 솜씨다. ‘석양에 돌아오다’가 크게 성공하는 데 있어 적어도 3할 정도는 모리코네의 덕이었다. ‘석양에 돌아오다’의 굵고 짧은 대사들은 모리코네의 음악과 호응하며 여운이 긴 여러 감정들을 빚어낸다.

레오네는 시나리오만 보내고 음악작업에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았을 정도로 모리코네의 실력을 믿었다고 한다. 롤랑 조페(‘미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1900’), 브라이언 드 팔마(‘언터처블’), 주세페 토르나토레(‘시네마 천국’) 등 세계의 명장들이 그와 일하기 위해 앞다퉈 손을 내밀었다. 레오네는 모리코네의 재능을 독차지하기 위해 함께 작업 중이라 바쁘다는 거짓말을 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직접 선곡한 음악을 쓰길 고집하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조차 모리코네와 일하고 싶어했다. 타란티노 감독은 모리코네가 이미 발표한 영화음악을 재활용하길 즐겼다. 웨스턴 ‘장고: 분노의 추적자’(2012)와 ‘헤이트풀8’(2015)으로 두 사람은 마침내 손을 맞잡게 된다. 모리코네가 한 인터뷰에서 타란티노의 작업 방식을 비난하며 둘 사이가 험악해지긴 했지만, 모리코네는 ‘헤이트풀8’으로 88세에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음악상 트로피를 생애 처음 품에 안았다. 

 모리코네 음악의 특징은 간결함이다. 악기 구성이 단출하고, 특정 소리를 과하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박한 음악은 아니다. 때론 웅장하고 화려하다. 절제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작곡하지 않은 음악을 사용할 때도 드러난다. 웬만한 사람이면 흥얼거릴 수 있는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에서 조금 낯설게 쓰인다. ‘예스터데이’라는 가사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연주만 흐른다. 주인공 누들스(로버트 드니로)가 감옥 출소 후 옛 친구와 연인을 찾아나서는 장면에서다. 지난 시간에 대한 회한과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교차하는 누늘스의 심정은 ‘어제’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족하다.



모리코네는 영화 500편 가량의 음악을 담당했다. 명작도 있지만 태작이 숱하다. 영화팬들에게 음악만으로 기억되는 작품이 적지 않다. 아마 모리코네는 음악만으로도 영화의 위상을 끌어올릴 수 있었던 유일한 영화음악감독이었을 것이다. 그의 음악 덕분에 많은 영화들이 천국 같았다. 이번 주말 해 저물 무렵 30분 가량 조용히 그가 남긴 음악을 들어보면 어떨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지친 일상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을 것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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