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최저임금액을 담판 지을 본격적인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 심의가 9일 열렸지만 회의 시작 두 시간도 채 안돼 파행했다. 경영계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경제난을 이유로 ‘최저임금 삭감’ 입장을 고수하자 노동계가 자리를 박차고 퇴장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 심의는 최소 오는 15일에 마무리돼야 하지만, 노사가 1차 수정안조차 내놓지 못한 채 갈등만 심화하는 상황이라 막판까지 진통이 예상된다.
최임위는 이날 오후 3시부터 정부세종청사에서 제6차 전원회의를 시작했지만 불과 1시간 30여분만에 종료됐다. 이날 근로자위원ㆍ사용자위원 양측은 최저임금 최초 요구안에 대한 1차 수정안을 제출하고 논의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사용자 측 수정안이 현행 8,590원에서 1%(90원) 삭감한 8,500원임이 알려지자 근로자위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는 최초안인 8,410원(2.1% 감액)보다 완화된 것이지만, 노동계는 ‘동결도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경영계 수정안을 확인한 민주노총 측 근로자위원들 일부가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고, 한국노총 측 근로자위원들도 당초 ‘한국노총이 마련한 수정안이라도 제출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이견을 확인한 뒤 퇴장했다.
이동호 한국노총 사무총장은 회의 후 열린 기자설명회에서 “사용자위원들이 최초안에 이어 수정안까지 삭감안을 제출한 상황에서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며 “경제가 어려운 책임을 400만 저임금 노동자가 짊어져서는 안되며, 삭감안으로 노사 모두를 벼랑끝으로 몰아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윤택근 민주노총 부위원장도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대선후보들이 최저임금 1만원을 공약했지만 여전히 삭감안을 내놓고 있는 경영계의 태도에 회의를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날 한국노총 근로자위원들은 최초안인 1만원(16.4% 인상)에서 다소 완화된 9,430원(9.8%)을 수정안으로 제출할 예정이었다. 이 사무총장은 “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1만원 인상은 과도하다는 공익위원들의 의견에 따른 조정안으로, 더 이상의 수정안은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다만 이는 근로자위원 대표안은 아니다. 이날 민주노총 근로자위원들은 내부 논의가 끝나지 않아 수정안을 확정하지 않은 채 심의에 참여했고, 사용자위원들이 제시한 수정안을 본 뒤 공동 수정안을 제시할 계획이었다. 경영계는 이날 공식 입장을 밝히진 않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동결안에 대한 반발이 커 소폭 인하를 결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내년도 최저임금을 내달 5일까지 고시해야 하는 만큼 최임위는 최소 오는 15일까지는 심의를 마쳐야 한다. 박준식 최임위원장은 오는 13일을 심의 기한으로 제시한 상태다. 이에 노사가 첫 수정안을 들고 온 이날 회의에서 본격적으로 간극을 좁혀갈 것으로 예상됐지만 최임위가 본론도 꺼내지 못한 채 파행하면서 내년도 최저임금은 안갯속으로 빠지게 됐다. 노동계는 “오는 13일 열리는 제7차 전원회의에서 밤샘 회의를 해서라도 14일까지 결론을 낼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경영계가 삭감안을 고수할 경우 다시 파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졸속으로 결정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날 심의 파행 후 공익위원과 사용자위원들만 남아 회의를 이어갔지만, 근로자측을 설득할 수 있는 진전된 내용을 마련하지는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 최저임금 결정시엔 노사가 2달여에 걸쳐 2~3차 이상 수정안을 제시하며 간극을 좁히는 과정을 거치는데, 내년도 최저임금은 사실상 하루만에 이 과정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