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코리아타운이라고 일컫는 일본 도쿄 신주쿠의 신오쿠보 거리가 다시 인파로 출렁이고 있다. 이를 두고 일부 언론에서는 ‘한류’가 되살아났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요즘 신오쿠보 한인타운은 한국음식, 혹은 화장품이나 한국 드라마 캐릭터 상품을 사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북적대고 있다. 지난 주에는 최근 신주쿠 호스트클럽의 집단 코로나 환자 발생 여파로 사람들이 약간 줄긴 했지만 거리가 텅 비다시피 한 지난 4,5월에 비하면 일취월장인 셈이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현재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한일관계가 큰 변수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정책에 불만이 있어도 웬만해서는 표면화시키지 않는 일본 국민들의 성격 때문에, 만약 일본정부가 한일 외교 문제를 빌미로 신주쿠 한인타운에 가지 말 것을 요청하는 ‘자숙’ 결정을 내린다면, 그야말로 한인타운은 하루 아침에 줄도산을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본 내 한국 전문가들은 그런 극한 상황까진 가지 않으리란 의견을 비친다. 한류의 뿌리가 워낙 깊어 아무리 아베 정부가 제동을 걸어도 이미 한국문화가 생활의 일부분이 된 일본 국민들에겐 그저 의미없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이야기다.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반 무렵까지 통기타 가수 이성애가 일본어로 리메이크해 부른 ‘노란샤스의 사나이(한명숙)’와 ‘이별(패티김)’이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일본팬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찾을 만큼 당시 톱스타 대우를 받았다. 말하자면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인들이 자주 불렀던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본격적인 한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본의 인기 가수들이 서로 앞다퉈 리메이크해 불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엔카 톱가수가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표절해 부를 만큼 조용필의 위상과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어서 1985년 일본 가요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계은숙은 특유의 허스키 보이스로 부른 데뷔곡 오사카황혼(大阪暮色)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 그 여세를 몰아 나중에는 ‘톱가수 베스트 5’ 반열에 오를 만큼 인기스타가 됐다. 이성애-조용필-계은숙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대활약은 훗날 한류붐의 초석이 됐다.
그런데 여기에는 절대로 간과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일본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재일동포들의 존재다. 이들 중에는 ‘청하로 가는길-48번’으로 1995년 TBS일본레코드 대상을 받은 아라이 에이치(박영일)처럼, 데뷔 때부터 자신이 재일한국인임을 밝힌 이도 있지만, 사회적인 편견과 차별이 무서워 일본인 이름으로 묵묵히 활약한 재일동포 연예인도 적지 않다.
'일본의 이미자'로 불리는 인기 가수 미야코 하루미는 아버지 때문에 인기 절정기인 1985년 전격 은퇴 선언을 했다. 경북 상주 출신인 아버지가 자신의 가수 활동 때문에 너무 많은 희생을 했다는 것이다. 국적도 숨기고, 무엇보다 그녀를 뒷바라지하려 도쿄에 있는 엄마와도 수십여년 간 떨어져 교토에서 혼자 외로이 살아왔다고 했다. 그런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본 열도가 깜짝 놀란 은퇴 선언을 한 것.
90년대 중반, 일본 스포츠계와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재일동포 유명인의 실명 그대로 적시한 ‘재일한국인의 저력’을 쓴 작가 우에다 다카히코는 “NHK 홍백가합전은 한국계 일본인 없이는 오늘을 말할 수 없다”고 그의 저서에서 주장했다.
2002년은 이보다 한일관계가 더 좋았던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일 문화사에 있어 역사적인 한 획을 긋는 해였다. 월드컵 공동개최라는 공통 분모 때문인지 빨강 티셔츠를 입은 한국인, 파란색 티셔츠의 일본인은 서로를 응원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꽹과리와 징을 쳐가며 신주쿠역을 돌며 응원할 때 일본인들도 기꺼이 손뼉을 치며 "대한민국 만세 짝짝짝"을 외쳤다. 작금의 분위기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 여세를 몰아 소위 '제1 한류 붐'의 쐐기를 박은 것이 일본의 사회현상이 된 '겨울연가'다. 2003년 공영방송인 NHK에서 방영돼 일본열도를 겨울연가 신드롬으로 이끌었고 100억엔 이상의 이익도 창출했다. 2009년에는 26부작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고 심지어는 파친코 도박 기계 배경화면으로까지 설정됐다.
겨울연가는 그때까지 조용히 살던 일본 주부들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줬다. 개인적인 자아 의식은 물론 여성성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했고,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던 10대의 첫사랑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만들었다.
수년 동안 연락 한번 없던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겨울연가를 계기로 빈번하게 전화 통화를 하고 나중에는 고부가 함께 손잡고 한국여행을 떠났다. 소원해졌던 동창생들이 욘사마 배용준 팬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다시 친해졌고 함께 팬클럽에 가입해 겨울연가 순례에 나서기도 했다.
일본 언론은 일본 여성들이 왜 겨울연가를 그토록 좋아하고 욘사마 신드롬이 이는 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정의내리고 분석하기에 바빴다. 각 민방들은 제2의 겨울연가를 찾기 위해 한국 드라마 시장을 두드렸다. 이후 이영애가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드라마 '대장금'은 한류팬 영역을 중년의 남성팬으로까지 확산되는 기폭제가 됐다. 이 시기가 한국에서 말하는 한류 제 1차 붐이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가수가 바로 한류 아이돌 효시로 불리는 보아다. 10대의 어린 나이로 일본 가요계에 데뷔, 가창력과 댄스가 모두 가능한 실력파 가수로 자리매김했다.
경제적인 효과도 대단했다. 걸어 다니는 1조원대 1인 중소기업이라고 불릴 만큼 보아의 활동은 눈부셨다. 한국 아이돌 가수의 저력을 보여주는 아이콘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 사이에서는 어느새 '한국 아이돌 가수들은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을 완벽히 소화해 내는, 믿고 보고 듣는 아티스트'라는 인식이 굳건하게 형성됐다.
만약 이같은 인식이 일본인 의식 저변에 내재돼 있지 않았다면, 소속사 SM이 제아무리 현지화 전략으로 일본 음악시장을 공략하고, 뒤이어 데뷔한 ‘동방신기’를 지원했더라도 대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구름 위에 떠 있는 여신적 존재’로 일본 팬들에게 각인된 ‘소녀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일본 열도에 상륙한 카라, 수퍼주니어, 빅뱅, 제국의 아이들, 엑소, 2PM, 에이핑크, 트와이스, BTS는 그래서 탄탄한 인기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재일 동포-이성애-조용필-계은숙-보아가 닦아 놓은 터전 위에 오늘날 ‘제2의 한류’라고 정의하는 한국 대중음악 K-POP이 꽃필 수 있던 것이다.
한편, 변호사 출신으로 오사카부 지사를 지낸 우익 정치인 하시모토 도루가 역사 문제를 언급하면서 “역사는 그렇다치고 딸이 한국의 걸그룹 트와이스 노래와 춤에 빠져 나도 함께 몇 번 봤다”는 내용을 트위터에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요즘 한국 언론에서 말하는 '제3차 한류 붐'이니 '제4차 붐'이니 하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일본사회에서 한국문화는 이미 하나의 장르로 정착됐기 때문이다.
최근 한낮에 방송하는 일본 TV 와이드쇼를 보면 한국에 대한 내용이 자주 나온다. 물론 대부분 한국을 비난하는 내용이 주류지만 간혹 한국 드라마나 요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방송에 출연한 게스트들이 빠지지 않고 묻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의 불시착 봤어요?” “이태원 클라쓰도 너무 너무 재미있어요.”
베스트셀러 ‘창가의 토토짱’으로 유명한 구로야나기 데쓰코가 방송에 나와 ‘사랑의 불시착’을 몇번이나 봤다고 이야기해 화제가 된 적 있다. 그러자 또다른 유명 연예인, 스포츠 스타들이 앞다퉈 방송에 나와 그 드라마를 재미있게 봤다고 거들었다.
이는 코로나19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지난 4월 16일, 일본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일본 전국에 긴급사태조치를 내렸다. 일반 식당은 물론 대부분의 상가가 일제히 문을 닫거나 조기 영업을 했다. 남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바로 이 때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한국 드라마다. 일본 인기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이 공공연히 “코로나 지옥을 한국 드라마 보는 재미로 이겨냈다”고 말한다. 어떤 연예인은 긴급사태조치 기간 동안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를 보다가 인기 있다고 소문난 한국 드라마 30여 편을 연이어 봤다고 밝혀 화제가 됐고, 또다른 유명 스타는 현빈과 손예진, 박서준의 작품을 모조리 찾아봤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배경 음악으로 나오는 노래도 따라 부르는 것은 기본.
이 같은 현상은 일반인들도 마찬가지다. 영상 전문 사이트인 넷플릭스(Netflix) 해외 드라마 랭킹을 보면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넷플릭스의 해외드라마 지난주 순위를 보면 1위가 ‘사랑의 불시착’, 2위 ‘이태원 클라쓰’, 3위가 ‘사이코지만 괜찮아’다. 사랑의 불시착은 지난 1월 TV도쿄에서 방영한 이후 지금까지 줄곧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또한 영화와 드라마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서비스업체 필막스(Filmarks)가 조사한 ‘2020년 상반기(1월-6월30일) 드라마 만족도 순위’에서도 일본 국내외 통틀어 종합 만족도 1위를 차지했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공통적으로 한국 드라마에는 일본 드라마에 없는, 인간 희로애락이 담긴 ‘사람이 중심’인 스토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탄탄한 구성력과 배우들의 흡입력 강한 명연기, 제작비를 아끼지 않는 과감한 현지 촬영,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배경 음악 등이 한 데 어우러져 완성도를 높인다는 것이다. '태양의 후예', '도깨비', '동백꽃 필 무렵' 같은 드라마들도 인기를 끄는 이유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에 등장하는 패션, 헤어스타일, 요리까지 덩달아 큰 인기다. 영화 '기생충'에서 스테이크를 얹은 짜파게티가 일본에서 불티나게 팔렸던 것처럼, 드라마에 등장하는 한국 요리도 일본인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치맥(치킨과 맥주)이 코리아타운 신오쿠보에서 인기를 끄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일본 드라마는 만화를 극화한 것이 많아 판타지성 분위기가 가득하다보니 한국 드라마처럼 스토리에 따라 주인공과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는 감정의 움직임이 거의 없다. ‘아, 소우(그래)?, 아, 소우닷타노카!(그랬었나!)”라는 표현이 전부라는 것이다. 게다가 긴급사태조치 기간 일본TV에서 매일같이 방영한 것은 대부분 과거 인기있던 서스펜스 드라마 재방영이었다. 살인 사건이 중심이다보니 온갖 잔인한 장면은 다 나온다.
1980~90년대 국민적 인기를 끌었던 ‘북으로부터’라든가 오는 16일 시작되는 금융드라마 ‘한자와 나오키’ 같은 완성도 높은 대형 드라마가 없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일본 드라마는 여전히 80,90년대에 갇혀 있어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이렇듯 일본 드라마는 한마디로 싱겁거나 잔인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몇 년 동안 일본의 남성들은 물론 10대까지 한국 드라마에 흠뻑 빠진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멜로드라마는 엄마와 딸이, 사극은 남편이 좋아하는 등 온가족 한국 드라마 마니아가 급증한 것이다. 여기에는 코로나로 인한 긴급사태 조치도 한몫 했다. 그렇지만 한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은 한국 드라마가 일본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 중심의 드라마라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 드라마가 기존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일본인들의 한국 드라마 쏠림 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유재순 JP뉴스 대표
1999년 일본 유학 후 현재까지 거주 중이며 호세이대학 객원연구원을 역임했다. 여러 매체에 일본 현지 상황을 알리는 르포 작가로 활동했고 현재는 일본 전문 뉴스 사이트 JP뉴스의 대표다. 저서로 '일본은 지금 몇 시인가' '일본여자를 말한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