벅차게 정치적이었던 예술가

입력
2020.07.0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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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7.8)


판화가 케테 콜비츠(Kathe Kollvitz, 1867.7.8~1945.4.22)는 내가 아는 가장 정치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는  20세기의 두 전쟁과 학살의 비극을, 노동자 농민의 비참과 삶의 진수를 치열하게 선동적으로 깎고 새기고 그렸다. 그에게 목판은 이념의 광장이었고, 여러 기법은 그때그때 정치적 메시지를 전할 수단이었다. 그는 인류 역사를 몽땅 부어 걸러도 마지막에 남을 굵은 보석이었고, 가장 영롱한 광채는 모두 사상과 윤리, 정치의 단면에서 뻗어 나왔다.   

'정치적'이란 말이 부정적 의미로 오염돼 정치적 예술가라 하면 언뜻 나치에 부역한 영화인이나 음악가를 떠올릴 수 있지만, 예술이 역사의 산물인 한 '순수'한 예술은 없다. 난리통에 그려진 목가적 풍경화나 꽃의 정물화만큼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것도 없다. 관건은 메시지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콜비츠는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주목한 까닭을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보여 주는 단순한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말했다. 궁핍과 억압에 견디고 맞서며 노동으로  먹고 사는 그 치열한, 단순한 아름다움을 그는 ‘직조공 봉기'(1893~97, 6편)와  ‘농민전쟁’(1893~1897, 7편) 연작으로 구현했다. 

그는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현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태어나 외가로부터 희생과 헌신의 신앙을, 아버지에게서 급진 사회주의의 계급적 이념을 체득했다. 10대 초부터 그림을 그려 베를린 여성예술학교를 졸업했고, 1891년 빈민구호 의사 카를(karl)과 결혼해 1992년과 1996년 아들 둘을  낳았다.

 둘째 페터(Peter)가 1914년 전장에서 숨졌다. 18세 어린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며 그는  “이 어린 것을 탯줄에서 잘라내는 기분이었다. 첫 번째는 태어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죽음을 향해 보내는 것이다”고 일기에 썼다. 보름 뒤 페터의 첫 편지가 왔고, 다시 일주일 뒤 사망 통지서가 왔다. 7편 ‘전쟁’(1922~23) 연작은 섬세한 에칭이 아니라 굵고 거칠고 강렬한 이미지의 목판화였다. 그건 목청이 아니라 심장을 떨어 낸 목소리였고, 시대를 관통한 반전의 절규였다.

1941년 그의 마지막 작품 제목은 ‘옥수수 씨앗마저 맷돌에 갈려선 안 된다(Seed corn must not be ground up)’였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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