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시간은 범죄 피해자의 시간보다 더 빨리 흐른다. 피해자가 망가진 일상을 붙들고 사투를 벌일 때, 범죄를 비난하는 세상의 시선은 맹렬히 타오르지만 이내 식을 뿐이다. 여론이 이내 떠난 광막한 시간은 오롯이 피해자 스스로 버텨내며 채워가야 한다.
유포 범위와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어 피해가 무한정 확산되는 디지털 성범죄의 경우 이 시차는 더 크다. ‘성범죄’. 이 세 글자에 따라붙는 음흉한 관음의 시선과 의심에 찬 낙인도 두렵다. 세상이 무서워 경제 활동을 포기해 생활고에 시달리는 피해자도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디지털 성폭력을 다룬 미디어 스타트업 닷페이스의 박혜민씨는 시간의 속도 차이를 푸념으로 접어 넘기지 않았다. 성착취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검거돼 여론이 들끓던 3월부터 피해자들의 경제적 지원 방안을 고민했다. 원래는 국가가 해야 할 일이었지만, 그게 부족하다면 직접 만들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단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와 협업해 방향성과 지원 방법 등을 정했다. 디지털 성폭력 피해경험자의 일상회복 프로젝트 ‘내가 만드는 하루’는 그렇게 시작됐다.
2일 서울 동작구 서울여성플라자에서 만난 박씨와 김여진 한사성 피해지원국장은 “법률ㆍ생계ㆍ삭제 지원 정책이 있지만 이는 피해자를 위한 최소한의 지원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오히려 피해자가 공동체에서 탈락하고 고립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단순히 밥을 굶지 않는 정도로는 일상이 회복될 수 없다”며 “피해자가 욕망과 일상을 다시 느끼는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원을 지급하는 데까지 지원책을 넓혀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프로젝트는 시민들에게 모금을 받아 피해자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지원을 신청한 피해자에게는 디지털 성범죄 피해를 입었다는 것 외에 다른 조건을 요구하지 않았다. 소득ㆍ피해 정도ㆍ피해 시점을 증명하거나 현금 사용 내역을 증빙할 필요도 없다. 대신 이 지원을 받는 것을 계기로 계획하는 ‘내가 원하는 일상’을 고민하고 예산을 짜오면 된다. 스스로 밝은 미래를 설계하기만 하면 지원이 뒤따르는 식이다. 김 국장은 “지원을 받기 위해 스스로의 비참함을 말해야 하는 기존 지원 체계를 뛰어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청인들이 계획한 일상은 다양했다. 당장 회생 절차에 필요한 돈을 내겠다고 말한 이가 있는가 하면, 여행을 가거나 영화를 보고, 도와줬던 주변 사람에게 보답을 하고 싶다는 내용도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취업 준비를 하는 등 프로젝트를 발판 삼아 미래를 계획하는 사람도 있었다.
최종 모금액은 4,403만원. 총 1,782명의 후원자가 마음을 보탰다. 후원자들은 ‘도울 기회가 생겨 다행이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스스로를 성폭력 피해자라고 밝힌 후원자도 있었다. 신청인 58명에게 1인당 최대 75만원을 지급할 수 있었다.
그리 많은 돈이 모이진 않았지만, 이 프로젝트는 그 존재만으로도 피해자들이 공동체의 따스함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피해자들의 신청서에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나의 일상 회복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거나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이 담겼다. “사람이 무서워 연락을 끊었던 친구들에게 피해 사실을 밝히고 관계를 이어나갈 용기를 얻었다”는 신청인도 있었다.
김 국장은 “활동가, 후원자, 피해자 모두 ‘회복할 수 있다, 해낼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공유하는 경험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박씨는 “1,782명이 보낸 응원이 피해자들의 결심을 더 강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이 가능성의 불씨가 좀 더 넓은 곳으로 퍼져 나가길 바라고 있다. 프로젝트 결과를 9월에 보고서 형태로 정리해 국가 지원체계로 제안할 예정이다. 박씨는 “독립된 기관으로서 별다른 제약 없이 가장 멀리, 가장 좋은 형태로 지원책을 실험해볼 수 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했고, 김 국장은 “피해자의 사회권 보장은 정부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