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한 점 그리실래요?” 老작가들 2030 관객과 하나 되다

입력
2020.07.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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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말 2020'전 학고재갤러리에서 31일까지


“잠시 앉아서 바느질 좀 해 보실래요?”

전시장 한복판, 노원희(72) 작가가 20대 젊은 관람객에게 말을 건넸다. 그가 준비한 건 갈라지고 쪼개진 천조각을 관객이 직접 꿰매는 바느질 퍼포먼스 ‘즐거운 바느질 시간’. 관객들이 바느질을 하면서 개인사나 사회적인 갈등을 치유하고 봉합하는 의도로 꾸려졌다. 전시에 참여한 대학생 김모(24)씨는 "바느질에 집중하는 동안 들끓는 마음이 좀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흙칠한 캔버스 위에 그림 한 점 그리실래요?”

전시장의 다른 한켠, 임옥상(70) 작가는 자기가 즐겨 다루는 흙 위에다 관객들더러 자유롭게 드로잉을 해보라고 권했다. ‘내달려라, 그림’을 선보인다. 전시 일주일만에 관객들이 그린 작품들로 한 벽면이 가득찼다. 임 작가는 이 과정을 영상으로 남겨 애니메이션 작업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평균 연령 72세 작가 16명과 관객들이 한데 어우러진 '미술 버스킹(거리공연)' 풍경이다. 잔치를 벌인 것은 1980년대 민주화, 노동, 인권 등의 주제에 천착했던 민중미술단체 ‘현실과 발언’(현발) 동인들이다. 강요배(68), 김건희(75), 김정헌(74), 노원희(72), 민정기(71), 박불똥(64), 박재동(68), 성완경(76), 손장섭(79), 신경호(71), 심정수(78), 안규철(65), 이태호(69), 임옥상(70), 정동석(72), 주재환(79) 등 참여 작가 면면만 해도 엄청나다. 이들은 1980년대 작품과 최근작 106점을 선보인다.

전시를 기획한 김지연 독립 큐레이터는 "1980년대 청년기 현실에 대한 발언을 응축한 작품들과 2020년 현실을 향한 발언을 담은 작품을 통해 여전히 유효한 '그림과 말'에 대해 모색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전시 제목은 현발 동인들이 1982년 개최한 전시 '행복의 모습'을 기록하면서 발간한 회지 '그림의 말'에서 따왔다. 

원로 작가들의 말은 그림에서 그치지 않고 관객과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프로젝트 룸'으로까지 나아간다. 전시기간 동안 작가들이 자유롭게 전시장에 출몰해 관객을 느닷없이 만나 대화하고, 작업한다. 작가들이 관객을 직접 그려주기도 하고, 관객들은 직접 작가의 작품에 참여한다. 박재동 작가가 그려주는 초상 퍼포먼스에 참여한 한 관객은 "유명 화가의 눈에 포착된 나의 모습이 어떤지 너무 궁금했다"라며 "초상을 받아들고 '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전시에서는 1980년대 당시 냉혹했던 현실에 대한 작가들의 말이 조용히 걸려 있다. 당시엔 하지 못했던 말들이 가득하다. 신경호 작가의 연탄재 위에 놓여진 검정고무신을 넣은 영정사진(넋이라도 있고 없고-행방불명)은 5ㆍ18민주화운동 이후 광주에서 실종된 무연고자들을 생각하며 제작한 작품이다. 화면 중앙에 보이는 고무신은 당시 광주의 길 위에 굴러다니던 신발 중 그나마 형체가 남은 것을 주워 붙인 것이다. 거지와 구두닦이, 넝마주이 등 아무도 행방에 관심을 갖진 않았지만, 어느 순간 모두 사라져버린 그 시절에 대한 작가의 절규가 고스란히 들린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 위에 쭈쭈바 광고 이미지를 덧붙인 김건희의 ‘얼얼덜덜’(1980년)도 모순적인 현실에 대한 작가의 날 선 발언이 그대로 담겨 있다. 작가는 “그때 이 작품이 팸플릿에 실리면 안 된다고 해서 밤새도록 신문 기사 내용을 지우기 위해 작품 위에 수없이 덧칠을 해야 했다”라며 “그 상처 때문에 그 이후에는 사회에 대한 얘기를 담을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 작품 옆에는 동해 앞바다에 솟아오른 촛대처럼 생긴 기이하고 절묘한 모습의 촛대바위를 그린 ‘금강사군첩 중 촛대바위’(2019년)가 나란히 걸려 있다. 

말할 기회조차 쉽지 않았던 1980년대에 비하면 지금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누구나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박재동 작가는 “당시는 말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예술로 표현할 것인가에 관해 고민을 했다면 요즘에는 SNS의 등장으로 시민들이 스스로 언론이 되었고 놀랄 만한 작품과 작업이 전문 미술가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라며 “누구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지금, 그림은 무슨 말을 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를 고민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도 이들은 여전히 현실을 향해 그림으로 말을 한다. “나에게 있어 미술은 세상을 향해 던지는 짱돌”이라고 표현한 이태호 작가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돌부터 2016년 경찰이 쏜 물대포에 스러진 백남기 농민 사건에 참여했던 농민 김기태의 돌까지 시대별 혁명을 이끌었던 이들의 돌을 전시한다.

1937년 일본의 중일전쟁 당시 공습 포격 지시의 장면을 그렸다가 올해 인왕산 암벽에 새겨진 ‘천황폐하만세’를 그려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역사의 상흔을 암시한 민정기의 ‘1939년’도 그들의 녹슬지 않은 현실 저항 의식을 보여준다. 1980년대 민중들의 당당한 모습을 그려온 박재동 작가는 이번에는 ‘바이러스’라는 주제로 김어준 방송인,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 등 유명인들의 초상을 그렸다.



박 작가는 “한때는 풍경화를 그리는 것조차 죄스러울 정도였다”라며 “예술가이기 전에 한 시민으로서,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멈출 순 없다”고 말한다. 김지연 큐레이터는 “1980년대와 마찬가지로 예술가들이 현실을 향해 발언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라며 “이번 전시에서는 이들이 역사에 박제되지 않고 동시대를 바라보는 예술가로 활동하는 저력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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