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만한 상반기 영화들의 ‘시선’

입력
2020.07.08 04:30
18면
'1917'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이 세상을 보는 법

편집자주

좋아하는 감독, 좋아하는 배우를 영화 한편만으로는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영화와 저 영화를 연결지어 영화에 대한 여러분의 지식의 폭을 넓히고 이해의 깊이를 더하고자 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여파로 상반기 극장 관객수는 바닥 수준이었고 개봉작도 급감했다고 하나 좋은 영화들이 없진 않았다. ‘기생충’과 미국 아카데미상을 두고 막판까지 경쟁했던 ‘1917’, 봉준호 감독이 자신 대신 아카데미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극찬한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그때 그사람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다룬 ’남산의 부장들’ 등이 있었다. 

이들 영화들의 공통점을 꼽으라면 ‘시선의 미묘한 변화'다.  그 변화가 뚜렷한 시대적 징후라면 코로나19로 만신창이가 된 상반기 극장가는 그나마 보이지 않는 소득을 남긴 셈이다.

우선 ‘1917’. 관객을 1차세계대전 한복판으로 끌고 가는 이 영화는 무지렁이 같은 병사 스코필드(조지 맥케이)의 시선으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다. 지도자의 영웅적인 결단 또는 지식인의 번뇌 따위는 이 영화에 없다. 그저 한 병사가 겪는 공포와 분노와 슬픔, (아주 짧은) 기쁨이 스크린을 채운다. 장면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듯한 신묘한 촬영술을 보여주는 이 영화에서 압권은 막바지 장면이다. 스코필드는 앞으로 돌격하는 병사들을 가로질러 공격 취소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내달린다. 질주하는 스코필드의 눈은 지휘부를 향한다. 마치 그들이 주사위 놀이하듯 내리는 결정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듯이. 숱한 반전영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인상적인 시선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명확하게 시선에 대한 영화다.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결혼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엘로이즈는 결혼을 원치 않기에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몰래 스케치해야 한다. 베일에 싸인 엘로이즈의 모습은 오로지 연인 마리안느의 시선을 통해서만 조금씩 드러난다. 가부장제 사회에 억압된 여성들의 모습을 그려낸 이 영화에서 단역을 제외한 등장인물은 모두 여성이다. 감독은 남성 관객들의 훔쳐보기 시선을 완강히 거부하며 형식에서나 내용에서나 완벽한 ‘여성영화’를 완성한다.



‘남산의 부장들’은 한국 영화에선 보기 힘들었던 눈으로 절대권력의 보편적인 실체를 들여다 본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2인자 자리를 다투는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병헌)은 도청을 통해 최고 권력자 박통(이성민)의 본심을 알고 싶어한다. 김규평의 도청과 훔쳐보기로 관객은 절대권력의 냉혹함과 마주한다. 2인자의 눈으로 최고 권력자의 민낯을 보게 되는 셈.




‘결백’은 가장 극적인 시선의 변화를 보이는 영화다. 주인공인 변호사 정인(신혜선)은 어머니인 화자(배종옥)의 살인누명을 벗기기 위해 변호에 나선 후 가족사의 비밀을 알게 된다. 살인사건의 실체를 응시하고 이 정보를 통제하는 영화 속 인물은 오직 정인 뿐이다. 정인은 진실을 봉인하는 대신 평생 짊어져야 할 고통을 떠안는다. ‘올드보이’와는 사뭇 다른 결말. 시선은 정보이고, 정보는 권력이다. 여자 주인공만 진실을 볼 수 없었던 시대는 이제 지나고 있는 지 모른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