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상이 거짓말처럼 트로트 열풍에 빠져 있다. 이 장르를 영원히 접할 것 같지 않던 젊은 층까지 ‘힙한’ 트렌드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열풍은 어딘가 수상하다. 좋은 노래들이 쏟아져 나와 생긴 본질적 흐름이 아니라 ‘음악의 예능화’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빨리 휘발될 위험이 크다.
한국 성인 가요는 미학적으로 파산한지 오래 됐다. 그래서 이 열풍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건 괴롭다. 가사는 너무 뻔하고 퇴행적이어서, 어떤 건 듣기에도 민망하다. 멜로디엔 미학적 수고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편곡은 열 곡이 한 곡인 듯 기계적 패턴을 반복해왔다. 그리고 교태 섞인 꺾기를 가창의 표준으로 삼아, 무대에서 품위를 밀어내 왔다. 그 결과 점잖은 주류 음악에서 밀려나 행사용 음악으로 전락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전국민이 다 아는 최백호의 메가 히트곡 ‘낭만에 대하여’ 가사다. 감당할 수 없던 실연의 고통조차 그리움으로 느낄 때가 온다. 삶의 시계가 늦은 오후를 가리키는 자기 연민의 날에, 고통스러워도 몸이 뜨거웠던 시절이 달콤했다고 노래하는 이 대목은 단연 절창이다. 노래는 이어진다. “첫 사랑 그 소녀는 /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첫 사랑의 황홀한 시간과 퇴락한 삶의 시간이 한 문장 안에 동거하며, 삶의 슬픔을 아련하게 빚어낸다.
가사는 간결하고도 시적이다. 이 멋진 가사를 담아내는 멜로디는 트로트의 전통에 기대 있지만 전혀 투박하지 않다. 최백호의 목소리엔 어떤 기교도 없다. 오로지 저 삶의 슬픔에 바로 가 닿기를 원하는 직진성만이 뚜렷하다. 기품 넘치면서도 페이소스가 가득하다. 좋은 어른의 음악은 이런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 성인 가요는 이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호객 하듯 들려오는 그 음악들을 서민들 애환을 대표한다고 염치없이 강변해왔다.
어느 음악학자는 트로트의 미덕이 솔직함이라 했다. 이런 진단은 하향평준화된 한국 성인 가요 시장을 이해하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솔직함이란 삶을 대면하는 솔직한 태도여야지, 감정을 여과없이 쏟아내는 미학적 방기여선 안될 것이다. 구전의 전통에 기댄 민요들을 보라. 쉽고 솔직하지만, 그 함축미와 긴장감은 예사롭지 않다. 구전을 통해 오랫동안 집단 조탁을 해온 결과다. 이제 그 조탁을 창작자가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성인 가요들은 그 책임을 방치한 채, 민망한 직설을 솔직함으로 포장하고 있다.
‘봄날은 간다’는 봄의 허무를 어느 서정시보다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아라비안 스케일의 전주가 멋들어진 ‘신라의 달밤’은 역사의 회한과 시간의 무상함을 노래한다. 김대중 전대통령의 18번이었다는 ‘목포의 눈물’은 또 어떤가. 이 노래 이후 목포는 우리들 슬픔의 기착지가 됐다. 모든 상실과 이별의 순간에 우리는 ‘슬픔의 도시’ 목포로 떠났다. 한국 성인 가요의 전통은 이토록 풍요로웠다.
노래가 격조를 잃으면 그 폐해는 고스란히 대중의 것이 된다. 좋은 노래 한 구절이 가슴에 오래 머물 때, 수용자 내면의 태도가 바뀌고 삶이 고양된다. 그만큼 삶의 이야기가 근사해진다. 반대로 저급한 노래에 삶이 포위될 때, 삶의 감각 역시 볼품없이 쪼그라든다.
지금의 트로트 열풍이 부디 우리 성인 가요를 건강하게 만드는 선순환의 고리가 되길 바란다.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멋진 노래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가수들은 행사용 자의식을 버리고, 그 옛날 좋은 선배들이 그랬듯 다시 음악가적 자의식들을 장착하기 바란다. 무대에서 객석의 눈치를 살피지 말고, 자신과 진지하게 대면하고 몰입하는 순간들을 만나기 바란다. 그 순간 서민들의 애환은 아름답게 고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