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왕국에 갇힌 선수들 "무서웠지만… 그런 게 운동선수의 세상인 줄 알았다"

입력
2020.07.06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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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폭력이 무서웠지만, 그런 게 운동선수들의 세상인줄 알았습니다.”

팀 내 가혹행위로 안타깝게 생을 마친 고(故) 최숙현 선수의 동료들은 담담하게 그들이 살던 세계를 폭로했다. 이들은 감독과 주장, 팀 닥터(운동처방사) 등 팀 내 권력자들이 자신들에게 손찌검하고 폭언을 쏟아 부어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그저 '그래야만 하는 세상인가 보다'라며 자조할 뿐이었다.

최 선수의 동료 두 명은 6일 서울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자신들과 최 선수가 입은 피해를 증언하면서 “팀은 감독과 특정 선수만의 왕국이었다”며 “폐쇄적이고 은밀하게 상습적인 폭력과 폭언이 당연시돼 있었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발 디딘 팀이 경주시청이었고, 감독과 주장 선수의 억압과 폭력이 무서웠지만 쉬쉬하는 분위기에 그것이 운동선수들의 세상이고 사회인줄 알았다”고 했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은 김규봉 감독, 장윤정 선수가 지배해 온 폐쇄적인 조직이었다. 성적을 내야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김 감독은 성에 차지 않는 선수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퍼부었다. 선수들에 대한 가혹행위에는 ‘팀 닥터’라 불린 운동처방사까지 가세했다. 단 전국체전 메달을 싹쓸이하고, 국가대표로 매번 뽑히는 장윤정은 예외였다. 과거 이 팀 소속이었던 A씨는 “장윤정은 김 감독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라며 “선수가 잘하면 감독 위세가 달라지기에 그에게는 달랐다”고 했다. 장윤정은 감독의 총애를 등에 업고 또 다른 피해를 양산했다. 실제 피해자들은 장윤정이 처벌 1순위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일반 선수들에게 ‘그들의 왕국’은 깰 수 없는 벽이다. 팀 내 권력자에게 반기를 들었다간 자신의 선수 생활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준형 젊은빙상인연대 대표는 “외부에 알리려 해도 신고 처리가 오래 걸려 그 사이 누가 신고를 했는지가 공공연하게 알려진다”며 “특히 팀을 직장으로 두고 있는 실업팀 선수들로서는 위험한 선택”이라고 꼬집었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선수들도 “운동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대회장에서 계속 가해자들을 만나고, 보복 당할까 두려워 고소하지 못했다”면서 “선수 생활 유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숙현 언니와 함께 용기 내 고소하지 못해 언니와 유가족께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비단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7~9월 전국 초중고 학생선수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만3,211명의 학생 중 9,035명이 언어폭력을, 8,440명이 신체폭력을 경험했다고 밝혔다. 응답자들은 언어폭력의 경우 주로 지도자(69%)가, 신체폭력은 지도자(75.5%)와 선배 선수(15.5%)가 주요 가해자였다. 지난해 부산시 강서구청 카누팀에서는 선수 한 명이 선배 2명으로부터 지속적으로 폭행ㆍ성추행을 당해 팀과 체육회에 이 사실을 알렸으나 1년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일도 있었다. 그사이 국가대표 출신인 가해 선수들은 전국체전에도 나갔다.

임승엽 고려대 국제스포츠학부 교수는 “제도적인 장치가 없어서 막지 못한 게 아니라 제대로 작용하지 않았기에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며 “대한체육회에서 책임을 지고 원인 규명과 처벌은 물론 선수의 장래까지도 보장해주는 등 핵심 역할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감독, 선수들에게 관련 교육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해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의 ‘미투’ 이후 스포츠혁신위원회가 출범해 7차 권고를 거쳐 개선안을 제시했으나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 대표는 “선수ㆍ학부모가 용기 내 신고하더라도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걸 지켜 본 주변 선수들까지 좌절감을 학습한다”며 “지도자 역시 사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오지혜 기자
이주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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