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과학으로 증명된다면 실재한다고 할 수 있겠죠. 우리를 둘러싼 공기처럼요. 하지만 신의 존재는 과학적 증명이 불가능합니다. 프로이트가 옳아요.”(남명렬)
“세상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어떻게 전부 다 과학으로 증명합니까. 과학만이 절대 진리는 아니잖아요.”(이석준)
“제 생각도 같아요. 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출발점부터가 잘못이라고 봐요. C. S. 루이스의 말대로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줬다는 게 중요하죠.”(이상윤)
이들 대화를 가만 듣고 있던 신구가 한마디 보탰다. “나는 프로이트 이 양반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던데.” 최고참 선배의 너스레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신구(84), 남명렬(61), 이석준(48), 이상윤(39), 네 배우는 요즘 만났다 하면 티격태격이다. 10일부터 서울 동숭동 예스24스테이지 무대에 오를 연극 ‘라스트 세션’ 때문이다.
‘라스트 세션’은 20세기 대표 지성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와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1898~1963) 두 사람이 신과 종교, 삶과 죽음을 주제로 벌인 논쟁을 담은 작품이다. 정신분석학으로 유명한 프로이트는 당연히 무신론자이고,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루이스는 뒤늦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회심자로 회심의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이 실제 만난 적은 없지만, 하버드 의대 교수 아맨드 M. 니콜라이는 이 둘이 만났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상상력을 발휘해 ‘루이스 대 프로이트’란 책을 썼고, 이를 마크 저메인이 무대화했다.
이 작품이 한국 무대에서 만만찮게 논쟁적인 데는 이유가 있다. 프로이트 역을 번갈아 맡는 ‘방탄 노년단’ 신구와 ‘지성파 배우’ 남명렬은 실제 무신론자다. 반면, 루이스를 연기하는 ‘대학로 간판’ 이석준과 ‘안방 스타’ 이상윤 또한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남명렬은 “개인적 신념과 잘 맞아 떨어지는 캐스팅이라 무대에서 불꽃이 튈 것”이라고 자신했다.
신구와 남명렬은 2년 전 평소 친분 있던 제작자에게서 대본을 받았다. 워낙 위대한 인물들이라 처음엔 엄두가 나질 않았지만, “언제 또 이런 작품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남명렬)는 생각에 “생애 마지막 도전”(신구)을 감행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에 “두 선배와의 만남을 꿈꿨던” 이석준과 이상윤이 힘을 보탰다.
예상대로 극은 만만치 않았다. 흘러 지나가는 대사 두세 마디 정도의 내용도 책 한 권짜리 얘기인 경우가 많았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 할 신구조차 “인물 근처에도 가 닿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고 털어놨다. 네 사람은 자료를 뒤지고 공부에 몰입했다. 남명렬은 “배우가 스스로 논리를 세우지 않으면 인물을 적확하게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보는 재미가 반감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뇌를 자극하는 지적 싸움이 주는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하다. “한 주제가 다른 주제로 이어지더니, 그 앞과 뒤 이야기가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요. 파고들수록 새로운 재미가 발견되죠.”(이상윤) “딱 펜싱 경기 같아요. 거리를 유지한 채 칼을 든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듯한, 그런 긴장감이에요.”(이석준)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코로나19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연극의 배경이 2차 대전이에요. 치열하게 다투다가도 전투기 소리에 납작 엎드리기도 하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여러 이념이 옳다 그르다 싸우지만 바이러스에 모든 것이 무너졌잖아요. 우리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이석준)
‘라스트 세션’은 TV드라마로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이상윤의 첫 연극 무대이기도 하다. 이상윤은 “그동안 연극을 너무나 하고 싶었다”며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 배우고 있다”고 했다. 평소 존경했던 신구와 한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도 큰 기쁨이다. 첫 연습부터 대본 없이 연기한다는 신구의 명성을 직접 확인했다. 신구가 “배우가 대사 외우는 건 얘깃거리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치자, 이상윤은 “두 번째 연습 때는 상대방 대사를 외워 오셨다”고 감탄했다.
그런 이상윤이 선배들은 흐뭇하다. 이석준은 “이상윤이 왜 스마트한 배우인지 알겠더라”며 “습득력이 뛰어나서 날마다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난다”고 칭찬했다. 신구와 남명렬도 “관객과 직접 호흡하면서 얻는 성취감을 경험하고 나면, 연극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며 예언(?)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