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남불도 우리가 하면 괜찮아" 완장은 부끄러움마저 덮는다

입력
2020.07.02 04:30
24면

편집자주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25>소신과 완장


“미국 상원 정보위원회는 2004년 7월 9일, 1년에 걸친 조사 끝에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 관련 보고서를 공식 발표했다. 핵심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은 모두 잘못된 정보와 과장된 정보에 기반한 것’이라는 내용. 이 보고서가 이목을 끈 것은 의회의 제도적 자율성과 의원들의 소신 있는 행동 때문이었다. 11월 대선을 코앞에 두고 현직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 보고서는 대통령이 소속된 공화당위원장이 주도했다.”


◇소신파와 완장파

김형준 교수의 칼럼에서 가져왔다. ‘국회의원은 그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라는 말은 바로 이를 가리킬 게다. 상원 정보위원장은 공화당 소속이나, 그 개인은 헌법기관으로서 당의 특수한 이익이 아니라 보편적 공익에 따라 행동한다. 물론 그의 정치적 판단들은 대부분 소속당과 일치하겠지만, 종종 둘이 어긋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때는 소신에 따라 크로스보팅을 할 수도 있다. ‘의원’이란 원래 이런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의원 관념은 이와 다른 모양이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금태섭 전 의원에 대한 징계. 민주당에는 권고를 넘어 강제라는 의미에서 ‘당론’이란 게 존재한다.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의원 개개인을 ‘헌법기관’으로 규정한 헌법의 상위규정 노릇을 할 정도다. 금 전 의원은 표결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소신을 ‘무효’로 표했지만, 당론은 ‘양심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마저 처벌했다.

의원을 바라보는 미국의 관념은 ‘자유주의적’이다. 개인을 집단보다 우선시한다. 반면 의원을 바라보는 한국의 관념은 ‘민주주의적’이다. 거기서는 개인의 소신보다 다수의 집단적 의지가 더 중요하다. 그래서 당 대표가 의원들에게 함구령까지 내린다. 대표가 당에 내리는 긴급조치인 셈인데, 올해만 벌써 네 차례 내려졌다. 이는 민주당식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보다 인민민주주의에 가깝다는 뜻이리라. 

민주당이 요즘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민주당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조금박해’라 불리는 조응천·금태섭·박용진·김해영 등 ‘소신파’가 있는가 하면, 이해찬을 필두로 윤호중이나 정청래 같은 ‘완장파’도 있다. 이 두 부류 사이에는 별 색깔 없이 거수기 노릇을 하는 대다수의 의원이 존재한다. 이 중 헤게모니를 쥔 것은 물론 친문 완장파들로, 그들의 견해가 바로 민주당의 ‘당론’이 된다.



◇협상이냐 전쟁이냐 

자유주의 정당이라면 소신파가 당의 주류를 이룰 게다. 하지만 민주당에서 소신파는 유감스럽게도 극소수이고, 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강성 완장파들이다. 당이 80년대 운동권 조직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같은 당에 있어도 소신파와 완장파는 멘탈리티가 사뭇 다르다. 소신파의 마인드가 자유주의적이라면, 완장파의 그것은 비(非)자유주의적이며, 심지어 반(反)자유주의적 색채를 띠기도 한다.

예를 들어 비주류 정성호 의원은 “상임위 협상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풀려는 전형적인 의회주의 마인드다. 주류 완장파는 생각이 다르다. ‘힘이 있는데 왜 양보를 하는가. 상임위원장 18석을 모두 차지하라는 게 선거로 표를 몰아준 국민의 뜻이다.’ 그들에게 정치는 ‘협상’이 아니라 다수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전쟁’일 뿐이다. 전형적인 칼 슈미트주의다. 

소신파의 ‘소신’은 주로 당이 보편적 ‘원칙’에서 벗어날 때에 표출된다. 이들은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는 후보의 이중성을 질타했다. 윤미향 사태에서는 당에 신속한 정리를 주문했다. 이처럼 소신파는 원칙의 보편성과 논리의 일관성을 중시한다. 이들 정치적 자유주의자의 철학적 토대를 이루는 것은 칸트의 정언명법이다.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으로서 타당할 수 있도록 행위하라.”

반면, ‘완장파’는 원칙의 보편성이나 논리의 일관성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들은 보편성보다 당파성을 중시한다. 자기들의 특수이익이 곧 사회의 보편이익이라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상황적 효율성. ‘내로남불’은 그들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어제 한 말을 오늘 바꿔버릴 수도 있다. 이를 그들은 외려 실천적 유연성으로 이해한다.



◇기회이성과 원칙이성

물론 정치인들은 그동안 여야를 가리지 않고 내로남불을 해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슈미트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이 과거에 했던 발언이나 과거에 세운 기준을 번복하며 사과를 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민망해한다면, 그들은 여전히 원칙의 보편성과 논리의 일관성을 정치의 토대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슈미트주의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아예 보편성과 일관성 자체를 포기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른바 ‘원칙이성’(Grundsatz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보편적·추상적 기준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이 기준들을 원리·규범·규칙·방법 혹은 신조로 삼아 유사한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하고, 그로써 문제의 보편적 해결을 추구한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거나 기준을 바꾸는 것은 이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와 달리 전체주의자들은 ‘기회이성’(Gelegenheitsvernunft)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한다. 그들은 보편적 기준 없이 매사 그때그때 상황의 필요에 따라 판단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 눈앞에 닥친 개별사안을 그때그때 편의에 맞게 처리해내는 상황적 합리성이다. 그들은 그 해법을 나중에 유사한 다른 경우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일반적·보편적 원칙으로 만드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지금 민주당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이 친문 완장파의 이 기회이성. ‘정치개혁’을 한다더니 상황이 급해지니 위성정당을 만든다. 검찰총장에게 ‘산 권력에도 칼을 대라’고 하더니, 정작 그 말대로 하니 당정청이 들러붙어 수사를 방해한다. 야당시절엔 인사청문회의 공개를 주장하다가 여당이 되니 청문회 비공개법부터 만든다. 이 미봉(ad hoc)과 즉흥(ad lieb) 속에 보편성이나 일관성이 있을 리 없다.



◇무너지는 보편성

인사도 마찬가지. 그동안 민주당은 도덕적 사유로 수많은 이를 청문회에서 낙마시켜 왔다. 하지만 그 기준이 조국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불법만 없으면 무방하다.” 기준을 인물에 적용하는 게 아니라 인물에 맞춰 기준을 정한다. 그게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양정숙 의원은 의혹만으로 즉각 제명하더니, 그 많은 의혹에도 윤미향은 제명하지 않았다. 여기서 인사의 보편적 기준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어쨌든 조국이라는 인물에 맞추어 제정한 그 기준도 다른 경우에 적용되는 보편성을 가진 게아니다. 검찰에 기소되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른다더니, 한동훈 검사장은 그 이름이 제3자들 간의 대화에서 언급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감찰이 시작되기도 전에 바로 좌천됐다. 이것이 친문 ‘완장파’ 특유의 기회이성이다. 문제는 이 기회이성의 화신이 이 정권에서 법무부장관을 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추미애 장관은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작년 11월 검찰의 수사·기소 주체 분리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다. 형사소송법과 검찰청법 위반이다. 검찰총장 지시로 서울중앙지검장 결재 없이 최강욱을 기소한 수사팀을 감찰하겠다고도 했다. ‘검찰총장이 검찰사무를 총괄 지휘·감독한다’는 검찰청법 12조 위반이다. 2월엔 “내가 책임지겠다”며 청와대 울산시장 선거개입 공소장을 비공개하기로 했다. 이건 그냥 망발이다.

장관의 기회이성이 확립된 법질서까지 흔드는 것이다. 조국·최강욱·송철호와 청와대 사람들 앞에서는 이렇게 법이라는 보편원칙마저 무력해진다. 조국 가족에 대해서는 피의사실 공표를 엄격히 막던 장관이 채널 A기자의 피의사실은 입으로 줄줄이 흘리고 다닌다. 그와 현격한 대조를 이루는 게 윤석열 검찰총장.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원칙이성의 선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뻔뻔함

결국 총장과 장관의 갈등은 두 이성, 즉 ‘원칙이성’과 ‘기회이성’의 충돌인 셈이다. 도처에서 정의와 공정의 확립된 기준이 무너져 내린다. 나라가 친문 완장들의 기회이성으로 통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규범의 보편성이라는 자유주의 신조를 겨냥한 전체주의 습속의 공격. 이 위협을 과장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간과해서도 안 된다. 완장들의 기회이성은 이미 다수대중의 의식에 깊이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왜 저토록 뻔뻔한가. 간단하다. 애초에 우리와 다른 이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회이성을 전문용어로 ‘잔머리’라 부른다.) 원칙이성의 소유자는 말이나 기준을 바꿀 때 부끄러움을 느낀다. 반면, 보편성이나 일관성에 매이지 않는 머리는 애초에 부끄러움을 느낄 수가 없다. 반성도 모른다. 반성은 자신이 보편적 규범에서 벗어났음을 인지해야 가능한데, 그 인지 자체가 안 되기 때문이다.

친문 완장파들에게는 모든 개별적 경우가 규칙을 새로 제정해야 할 제헌적 상황이다. 그래서 매순간마다 자기들은 혁명가다. 그들은 자기들의 기회이성이 원칙이성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원칙이성은 기존질서를 수호하는 이론가들의 것이고, 기회이성은 세상을 바꾸는 실천가들의 것. 그래서 규범을 어기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외려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뻔뻔함은 여기서 나온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 최강욱 의원의 머리는 ‘증명서 허위발급이 보편적 규범이 되면 사회가 어떻게 될까?’라는 당연한 물음을 떠올리지 못한다. 재판 도중 법정을 박차고 나오려 한 것도 그에게는 기존질서를 무효화하는 혁명가의 정의로운 제헌적 폭력일 게다. 80년대 전체주의 정치학이 이렇게 친문 완장들의 습속으로 남아 이 나라를 기분 나쁜 색조로 물들이고 있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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