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관은 왜 '인국공 논란'의 중심에 섰나... 이장→장관 '리틀 노무현'?

입력
2020.06.29 16:18
야당의 공격에도  "노동 시장 이중구조 바꾸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라며 목소리 높여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의 비정규직 보안검색 요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문제와 관련해 연일 소신있는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경남 양산을)입니다. 그 시작은 2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었습니다. 김 의원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지적하는 글에서 "조금 더 배우고 필기시험 합격해서 정규직이 됐다고 비정규직 보다 2배가량 임금을 더 받는 것이 오히려 불공정하다"고 썼다가 많은 이들의 비판을 많았는데요.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하태경 미래통합당 의원, 오세훈 전 서울시장 등이 연이어 자신의 논리를 비판하자 "사실을 호도하지 말라", "팩트체크부터 하고 오시라" 등 반박 글을 올리며 설전에 나서기도 했죠. 29일에도 또 다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가 2배가 나는데도 '불공정'이 아니란다. 차별을 그대로 두자는 것인지 이해가 안 간다"며 노동시장의 임금 구조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또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모든 청년이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도 호소했고요. 그 많은 여당 의원들 중에서도 왜 유독 김 의원은 이번 인국공 사태에 목소리를 높이는 걸까요.


현실판 '이장과 군수'? 배경부터 남다른 김두관


김 의원은 시골 마을 이장으로 지방 행정에 첫 발을 내디딘 뒤 행정기관의 수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꼽혀요.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김 의원은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다고 해요. 고교 졸업 후에는 농사를 짓다가 뒤늦게 대학에 진학했어요. 방송통신대와 전문대를 거쳐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습니다.

뒤늦게 민주화운동에 눈을 뜬 그는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도 가입했는데요. 민통련 간사시절 직선제 개헌 투쟁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른 적도 있어요. 1986년 직선제개헌추진본부 충북지부 결성대회 주도 혐의로 3개월 동안 수감된 거에요. 이후 고향 이어리로 내려가 남해농민회를 조직해 사무국장을 맡으며 농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만 29세의 젊은 나이에 이장이 된 건 그 무렵의 일이었어요. 빗자루를 들고 마을 청소를 하는 등 솔선수범하는 젊은 이장이었습니다. 지역 농민회의 뜻을 따라 1988년 13대 총선에도 출마했으나 아쉽게 졌어요.

두 번의 설움은 없었습니다. 1995년 민선 1기 지방선거에 무소속으로 나서 남해군수로 당선된 건데요. 그의 나이는 36세에 불과했습니다. 기초 단체장 중 최연소였죠.

그때부턴 개혁, 파격의 연속이었습니다. 관사를 헐고 ‘열린 행정’을 위해 군수실 한쪽 벽을 투명한 유리로 바꿨고, 군수 업무추진비 내역을 인터넷에 공개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1996년 남해에서 벚꽃축제를 열었을 때 홍보를 위해 남해대교 번지점프대에서 맨 먼저 뛰어내렸던 일화는 잘 알려져 있죠. 2002년 발간한 '남해군수 번지점프를 하다'는 책 제목처럼요. 과감했던 그의 행보 덕이었는지, 1998년 2기 지방선거 때 과반이 넘는 득표율로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노무현과의 만남… 리틀 노무현의 탄생


군수로 보낸 7년의 시간도 의미가 있었지만, 뜻을 펼치기엔 작은 무대였습니다. 그렇게 3선 도전은 뒤로한 채 2002년 지방선거에서 경남지사직 도전을 저울질하게 된 건데요.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때 마침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지방선거에서 부산ㆍ울산ㆍ경남 중 한 곳엔 당선인을 내겠다고 공언했는데요. 당선은커녕 후보를 구하기도 힘들었던 때라, 남해군수였던 김 의원에게 SOS를 친 것입니다. 김 의원은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에 서겠다"며 야심차게 도지사직에 도전했지만, 첫 번째 경남지사직 도전에서는 쓴맛을 봐야 했습니다.

하마터면 인생이 달라질 뻔한 순간도 있었어요. 노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청와대 참모직을 제안한 건데요. 그러나 "저는 현장 체질이다. 내각에서 일하고 싶다"고 제안을 거절했고, 이후 행정자치부(행정안전부 전신)의 수장이 됐습니다. 고건 당시 총리를 비롯해 시골 군수 출신에게 행정자치부장관을 맡길 수는 없다는 많은 반대 여론이 있었지만, 끝내 중진의원이나 꿰차던 장관직에 시골 군수 출신의, 44세였던 김 의원이 가게된 겁니다.

물론 '김두관 장관'은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비주류의 집권에 거부감을 보였던 보수 야당에서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킨 건데요. 대통령에게 더 이상 정치적 부담을 안길 수 없었던 그는 자진해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2010년에는 한 차례 고배를 마셨던 경남지사직에 재도전해 승리했습니다.



어쩌면 김 의원이 이중구조, 차별에 목소리를 높이는 배경에는 그가 걸어온 남다른 길과 환경에 있을 지도 모릅니다. 김 의원 측 관계자는 이날 한국일보 통화에서 "김 의원의 어머니가 평소에 '언덕은 낮춰보아도 사람은 낮춰보지 말라'고 강조했다고 한다"며 "현 정부가 양극화 해소를 최대 정책 과제로 삼는데다 자라온 배경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김 의원의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논어에 나오는 구절인 '불환빈 환불균(不患貧 患不均)'이 써있는데요. 백성은 가난한 것에 분노하기보다 고르지 못한 것을 걱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김 의원 본인은 소신있게 발언을 계속하고 있지만 온라인에서는 여전히 노력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냐는 비판 댓글이 많습니다. 통합당은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해서 필기시험에 합격하는 것만큼 공정한 게 있느냐"며 날을 세우기도 하고 있구요. 

김 의원의 발언이 이번 정규직 전환 때문에 자칫 신규 채용이 줄어들까 걱정하는 취업준비생들의 마음을 얼마나 진정시킬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윤한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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