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코로나 못지않게 ‘포스트 코로나’라는 말을 많이 접한다. 코로나 이후의 시기를 준비하자는 말이니 그 취지도 이해한다. 그런데 머리로는 이 말을 이해해도 마음이 선뜻 움직이지 않는다. 게을러서도 무지해서도 아니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마스크를 한 채로 방역, 수업, 급식, 돌봄, 방과후 활동을 모두 해내야 하고,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인 행정사무까지 하느라 늘 몸이 바쁘고 지친다. 그저 몸으로 코로나를 겪느라 마음으로 포스트 코로나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도 포스트 코로나를 논하는 자리를 마냥 피하지는 않았다. 포럼, 회의 등에 지친 몸을 이끌고 달려가보기도 했고, 원격으로 참여도 해 봤다. 그러면서 느낀 게 있다.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정리해 보는 것도 학교의 포스트 코로나를 준비하는 한 방편이라 생각하고 두서없이 적어 본다. 코로나도 그동안 지켜본 학교의 상황을 보고 교육에 대해 무슨 할 말이 있을 것 같다. 이를 전지적 코로나 시점으로 바라보았다.
코로나는 수업을 교육의 최대 관심사로 돌렸다. 학교교육의 가장 기본이 되는 활동이 수업인데 그동안 교육을 논하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수업은 논의의 주제도 되지 못했었다. 그런데 최근 몇 달 동안 교육부를 비롯해서 학교까지 등교 시기를 비롯해서 수업 운영 방식에 모든 논의의 초점이 맞춰졌다. 언론도 날마다 학교의 수업 상황을 기사로 전했다. 수업이 이렇게 교육의 중심에 섰던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이 관심이 고맙다. 계속해서 수업이 교육의 최대 관심사가 되게 하려면 교육에 대한 모든 논의의 장에서 수업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가야 한다.
코로나는 학교를 교육정책의 중심에 서게 했다. 그간 교육이라는 이름을 달고 만들어진 숱한 정책과 사업들은 수업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설 자리를 잃었다. 담당 부서는 법적 근거나 지침이 있어도 시행할 수 없었고, 배정 예산이 있어도 집행할 수 없었다. 거꾸로 학교에서 요구하고 교육청과 교육부가 이를 지원하는 일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원격수업을 시작으로 등교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교육부, 교육청, 지자체의 교육사업들은 여전히 학교의 눈치를 보고 있다. 코로나 이후 교육부는 교원단체들과 소통 채널을 만들어 공문이 아니라 SNS로 즉각적인 학교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교육부가 언제 이렇게 학교의 눈치를 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이 눈치가 싫지 않다. 계속해서 교육부가 학교의 눈치를 보게 하려면 모든 교육정책을 학교를 중심으로 재편해야 한다.
코로나는 ‘학생이 있어야 학교다’라는 공감대를 키웠다. 개학과 등교가 수차례 미뤄지자 학생들은 학교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교사들은 “너희들이 있어야 학교다”라는 말로 화답했다. 방역 지침을 지켜가며 교육활동을 해내기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지만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니 비로소 학교에 생기가 도는 것을 느낀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학교에서 만나기를 그리워했던가? 잠깐은 있었지만 이토록 긴 기다림과 그리움은 없었다. 이 느낌이 좋다. 이 느낌을 살려가려면 포장된 구호 속에서만 학생들이 교육의 주체로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법, 학칙, 학교생활규정의 구체적인 문장 속에 이들이 주어로 자리 잡아야 한다. 그에 합당한 권한과 책임을 오롯이 행사해야 한다.
안 그래도 얄미운 코로나를 무슨 공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렇게 치켜세운 이유가 있다. 코로나 이후에도 코로나가 가져온 이 세 가지 관점만큼은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이 바람이 있는 한 나는 왜 교사가 되었고, 교사가 되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 갈 것이다. 다시 현실의 학교로 돌아오더라도 이만한 낙관과 기대는 있어야 버틸 힘이라도 얻는다. 어쨌든 나아가든지 멈추든지 이후의 선택은 코로나가 아닌 내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