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 채팅창을 읽고, 유튜브를 보고... ‘페이퍼리스 책’ 시대가 본격화

입력
2020.06.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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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일주일에 한 권 정도는 꾸준히 책을 읽어왔던 최모(45)씨. 지난해부터는 종이책을 손에서 놓았다. 대신 책을 ‘듣기’ 시작했다. 마흔 넘어 노안이 오면서 글자를 읽는 일이 힘들어진데다,  출퇴근이나 걷기 운동을 할 시간에도 책을 읽을 수 있어서다.

진흙판에서 파피루스, 양피지, 종이를 거쳐 전자책까지. 책을 읽는다는 건, 인류의 오랜 경험과 지식을 이어받는다는 행위였다. 하지만 이제는 책을 단순히 읽지만 않는다. 듣고, 채팅하고, 본다. 책은 책이되 실물 종이가 없는, '페이퍼리스(Paperless) 책'의 시대가 본격화된 것이다. 

본격화의 징후는 여러 곳에서 분출된다. 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정부도 지난 3월  '2019국민독서실태조사'를 발표하면서 이 '읽지 않는 책'들을 독서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그게 무슨 독서냐'라던 오랜 심리적 마지노선이 뚫린 것이다. 


◇자동합성된 유인나 목소리로 읽어준다 ... '듣는 책' 오디오북 

가장 급부상하는 건 ‘듣는 책’, 오디오북이다. 지난해 글로벌 시장조사 기관 딜로이트가 내놓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글로벌 오디오북 시장 규모는 35억달러(약 4조 2,655억원)에 달한다. 미국과 중국이 전체 시장의 75%를 차지하고, 한국은 300억원대로 추정된다. 

그 때문일까. 최근  세계 최대 오디오북 업체로 ‘오디오 업계의 넷플릭스’라 불리는 ‘스토리텔’이 아시아에서 세 번째로 한국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스토리텔은 한국의 오디오 콘텐츠 시장이 향후 5년 내 '조 단위'로 성장할 것이라 내다봤다. 실제 2019년 기준 한국 내 오디오북은  2,500여종으로, 전년도인 2018년에 비해 '418%'라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스토리텔의 상륙 선언에도 아직까지 한국의 오디오북 시장은 네이버가 서비스하는 ‘오디오 클립’, 출판사 인플루엔셜이 출시한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가 양분하는 체제다. 그 뒤를 밀리의 서재, 리디북스, 교보문고, 팟빵 등이 바짝 추격하고 있다.

네이버 '오디오 클립'은 2018년 당시 국내 최대 오디오북 제작 유통업체인 오디언소리를 인수하며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후 지난해 12월 유료 서비스 론칭 1년 만에 누적 사용자 21만 명을 돌파하며 오디오북 시장의 성공 가능성을 내비쳤다. ‘윌라’ 또한 지난 4월 산업은행 등으로부터 135억, 지금까지 총 210억의 투자금을 유치했다. 적어도 오디오북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크다는 걸 보여주는데는 성공했다. '윌라'는 최근  배우 김혜수를 모델로 쓴 TV광고를 내보내는 등 공격적인 마케팅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스토리텔도 성장을 자신하고 있다. 박세령 한국지사장은 “코로나19 이후 집에서 여가를 보내는 인구가 늘면서 스토리텔 가입자가 지난 1분기 대비 3.5배 증가했고 기존 이용자의 청취율도 25% 증가했다”며 “특히 유아동, 자기계발, 경제경영서 등이 인기 장르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디오북의 적극적 공세 배경엔 기술 발달이 있다. 예전에도 유명 배우나 성우가 직접 읽어주는 방식의 오디오북은 있었다. 가령  자서전을 내놓는 미셸 오바마가 자신의 목소리로 직접 읽은 오디오북을 같이 내놓는 식이다. 하지만 요즘 오디오북은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최근 쓰이는 기술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문자 텍스트를 자동 인식하는 TTS(Text to Speechㆍ문자음성자동변환)다. 네이버는 자체 개발한 음성합성 기술을 통해 배우 유인나의 목소리를 샘플링한 TTS엔진을 오디오북에 적용했다.  간단히 말해 유인나가 일일이 모든 책을 다 읽지 않아도, 저절도 합성된 목소리가 읽어낸다. 더 다양한 책을 오디오북으로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채팅창을 탭해야 이야기가 움직인다 … ‘채팅하는 책’ 채티

종이책만큼이나 스마트폰이, 문자보다 영상이 더 친근한 10대들에게도 독서는 책읽기를 뛰어넘는다. 최근 웹소설을 채팅형으로 꾸민 ‘채팅형 소설’(Chat Fiction)이 인기다. 기성세대는 저게 무슨 독서인가 싶은데, 10대들은 당당히 책을 읽었노라 말한다.



‘채팅형 소설’은 말 그대로 채팅창을 배경으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소설이다. 채팅형이니 당연히 '인터랙티브'한 요소도 들어간다. 독자가 채팅 화면을 ‘탭’하면 등장인물의 대사가 떠오른다.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메신저 같은 SNS 사용이 익숙한 세대에게 최적화된 읽기 형태인 셈이다. 채팅형이라 해서 문자만 주고받는 식은 아니다. 비디오, 사운드, 이미지까지 지원한다. 

채팅형 소설은 2015년 미국에서 시작됐다. ‘얀(Yarn)’, ‘훅트(Hooked)’, ‘탭(Tap)’, ‘클리프행어(Cliffhanger)’ 등  스타트업 기업들이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2018년 5월 선보인 ‘채티(Chatie)’가 대표적 서비스로 꼽힌다. 채티는 출시 6개월 만에 앱 다운로드 50만건을 기록했고,  지난해 25억원 투자유치에 성공하면서  국내 채팅형 소설 시장을 이끌고 있다. 채티의 누적 가입자는 현재 140만명이다. 이 가운데  70%가 10대다. 

전자책 서비스업체인 ‘밀리의 서재’도 지난해 채팅형 소설 ‘챗북’을 선보였다. 채티가 기획단계부터  채팅을 염두에 둔다면,  챗북은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나 ‘알바생 자르기’ 같은 기존 화제작을 채팅형 소설로 각색한다.



채팅형 소설의 강점도 역시 기술에서 나온다. 비교적 간편한 알고리즘을 짜면 가능하기 때문에  손쉽게 방대한 양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채티는 독자들에게 아예 '에디터 툴'까지 제공하고 있다. 채팅형 웹소설을 써보고 싶다면, 누구든지 써보라는 것이다.  SNS를 통한 대화에 익숙한 10대들은 손쉽게 소설쓰기에 도전해볼 수 있는 셈이다.

채티를 서비스하는 아이네블루메 최재현 대표는 “요즘 콘텐츠의 숙명은 매순간 이용자들의 이탈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라며 "흥미요소를 끊임없이 던져야 하는데, 채티는 이 같은 흐름의 최첨단인 셈"이라 말했다. 


◇3분만에 핵심요약 ... ‘보는 책’ 북튜브

오디오북과 채팅형 소설은 그래도 직접 읽는다. ‘북튜브’(Book + Youtube)는 그 읽는 행위마저 보는 것으로 대체한다. 요리에서 조립까지 온갖 정보를 집어삼키던 유튜브가 책도 먹어치운 것이다.



북튜브는 크게 두 유형이다. 자기가 재미있게 읽은 책을 소개하거나, 아예 책을 줄줄 읽어주는 ASMR 콘텐츠다. 이 경우는 독서 그 자체라기보다 독서의 사전단계로 간주된다. 영상을 접하고 흥미를 느낀 이들이 책을 사보는 경우가 있어서다. 

‘김미경TV’가 대표적 북튜브로 꼽히는 이유다. 여기서 소개된 ‘아주 작은 습관의 힘’, ‘철학은 어떻게 무기가 되는가’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의 경우 김미경TV에 소개된 뒤 일주일간 예스24 기준 판매량이 5,360%나 솟구치기도 했다.



◇기존 출판업계도 들썩...실제 독서율 영향은?

종이 없는 페이퍼리스 책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출판계도 더 이상 '침 묻혀 페이지 넘기는 재미'만을 고집하긴 어렵게 됐다.  해냄출판사는 조정래 작가의 신작 ‘천년의 질문’을 내면서, 쌤앤파커스도 낸 김진명 작가의 ‘직지’를 내면서 종이책 보다 오디오북을 먼저 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은 '듣는 연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김연수 작가의 8년 만의 신작이라는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을  6월 1일 자정부터 26일까지 총 20회 15분씩 읽어주는 방식으로 연재했다. 종이책은 이 연재가 끝나야  출간된다. 김금희, 임경선 작가 등의 신작도  ‘듣는 연재’ 뒤 출간될 예정이다. 

문체부가 지난  3월 '2019국민독서실태조사'에다 오디오북, 채팅 웹소설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것 또한 중대한 변화다. '그게 어떻게 책을 읽는 것이냐'는 오랜 저항과 논란을 뛰어넘어, 이제 '듣고. 채팅하고, 보는 행위'도 독서에 포함돼야 한다는 것 정도에는 합의에 이르렀다는 의미다. 


2017년과 2019년의  성인 연간 독서율(%)독서율: 종이책, 전자책, 오디오북 중 한 가지 이상 읽거나 들은 비율


종이책종이책+전자책종이책+전자책+오디오북
201759.962.3
201952.155.455.7


관심은 파급력이다. 새로운 기술에 따른 새로운 시장 창출 가능성은 늘 거론되지만,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도 많다. 독서에 대한 보수적 시각, 영세한 출판 환경, 한국어라는 시장의 제약 등을 감안하면 쉽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2019국민독서실태조사에 책임연구자로 참여한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기존 독서 인구가 게임이나 영상물 등 다른 여가활동으로 분산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종이책을 읽지 않던 사람들이 웹소설 등을 통해 새롭게 유입되기도 한다"며 "기술과 콘텐츠의 조화를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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