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을 다시 읽는다

입력
2020.06.28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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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연재]<14>한용운 '님의 침묵'

편집자주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가는 연재입니다.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6월 29일은 독립운동가이자 불교 개혁가이자 시인인 만해 한용운이 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승려도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자신도 약 19년 연하의 유숙원과 결혼한 사실은 세간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반면, 그의 시집 '님의 침묵'은 한국 문학사의 고전으로 폭넓게 알려져 있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시 ‘님의 침묵’은 대부분의 고교 교과서와 참고서에 실려 있고, 입시 문제의 단골 소재이다.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고 버티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는 이 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문학작품의 해석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험에 나오는 이상 수험생들은 정답을 찾으려 들 것이다.

정답을 찾다 보면, “종교적 믿음을 광복의 의지와 연결하여 노래한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이 간행된 것은 이 시기의 중요한 문학적 성과”라는 교과서의 서술이나 “윤회 사상이라는 불교적 사유에 기초한 것으로 고통을 감내하고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된다”와 같은 참고서의 내용을 외우게 된다. 이 모두 한용운이 승려였다는 사실과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고려한 해설이다.



시 ‘님의 침묵’에서 뭐니 뭐니 해도 궁금한 것은 ‘님’의 실체이다. 시 속의 님이 침묵할 뿐 아니라, 시인도 님의 신원에 대해 침묵하므로, ‘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문학작품의 해석은 열려 있는 것이기에, 한 참고서는 “임은 ‘조국’ ‘부처’ ‘진리’ ‘사랑하는 사람’ 등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데, 총체적으로 볼 때, ‘임’은 ‘가치를 지닌 모든 존재’로 규정할 수 있다”라고 해설한다. 음, ‘가치를 지닌 모든 존재’라니 이것은 너무 포괄적인 해석이 아닐까. 디저트에 가치를 발견하는 나는 이렇게 노래해도 되는 것일까. “나의 디저트는 갔습니다... 나는 나의 디저트를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걷잡을 수 없는 포만감을 옮겨서 새 공복감의 정수박이에 들어붓습니다.”

너무 열린 해석을 통제하려면, 아무래도 ‘님의 침묵’이 출간된 1920년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마침 한 참고서는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지어 본다면,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임이 침묵하는 사태로 보고 조국 광복에 대한 강한 신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해설한다. 정부에서 관장하는 입시 답안답다. 그러나 의문은 남는다. 조국 광복의 신념을 말하는데 왜 하필 성애의 대상으로 보이는 ‘님’을 끌여들여야 했을까.

아마도 그런 궁금증 때문이 아니었을까. 2012년 2월에 한국일보의 서화숙 기자는 한용운의 딸 한영숙씨를 인터뷰하면서 다음과 같이 물어본 적이 있다. “‘님의 침묵’의 님이 조국이 아니라 실제 사귀었던 연인이다, 이런 설도 있는데요.” 그러


자 한영숙씨는 “독립운동가도 남자고 사람인데 여자를 사귀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모든 대중이 보는 시집에 그렇게 쓸 분은 아니야.”라고 대답했다.



실로 ‘님’이 한용운이 사귄 여자를 지칭한다면 문제이다. 시의 정치적인 함의가 증발할 뿐 아니라, 무슨 스토커의 고백처럼 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헤어진 여자에게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하면, 그 여자는 섬뜩하지 않을까. 막걸리를 정수리에 부으면서,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라고 읊조린다면, 그만한 공포 영화가 없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수험생이 아니므로 기존 교과서나 참고서의 설명은 무시하고 ‘님의 침묵’에 대한 논술에 임해보겠다. 낙제를 하면 어떠랴. 독자 앞에 놓인 질문은 이것이다. 왜 하필 성적 욕망을 암시하는 연시(戀詩)를 승려가 그것도 하필 망국의 시대에 썼는가.

한용운은 승려답게 욕망의 동학에 관하여 전문가이다. 불교는 인생이 고해인 이유는 바로 헛된 욕망에 근거한 집착에 있다고 본다. 그러한 통찰을 역이용하기 위해서 한용운은 일부러 성애의 대상일 수도 있는 ‘님’을 등장시킨다. 무릇 욕망(성욕)은 충족되지 않을 때 가장 강하고, 충족하고 났을 때 가장 약하다. ‘님의 침묵’에 대한 빛나는 평론을 쓴 김우창의 표현대로 하자면, “욕망은 현존하지 않는 것, 부재 내지 無를 有로 설정한다.”

음, 어려운가. 예컨대 식색(食色)의 욕망을 약하게 하는 방법은 과하게 먹거나 과하게 성행위를 하는 것이다. 하고 나면 욕망은 사그러든다. 반면, 식색의 욕망을 강하게 하는 방법은 먹거나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충족되지 않은 욕망은 더 절실해진다. 이것이 욕망의 동학이다. 실로 한용운은 “수(繡)의 비밀”이란 시에서 일부러 바느질을 완성하지 않는 마음에 대해 노래한 적이 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은 것입니다.” 주머니를 다 짓고 나면 욕망이 다 해소되어버리므로, 욕망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주머니를 완성하지 않는 것이다.

소설가 김승옥의 196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생명연습'은 이 욕망의 동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생명연습'에는 한교수라는 이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여자친구 정순은 “배암과 같은 이기심을 발휘하여, 대학 졸업 후 런던 유학을 꾀하고 있는 한교수에게 그 계획을 포기하라고 희생을 강력히 요구해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한교수는 일기에 딜레마를 이렇게 적는다. “정순과의 결혼이냐 젊은 혼을 영국의 안개 낀 대학가에서 기를 것이냐,” 그는 마침내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낸다. “정순의 육체를 범해버리기로 한 것이었다...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한교수의 사랑은 식어질 수 있었다. 다음해 사쿠라가 질 무렵엔, 마카오 경유 배표를 쥐고도 손가락 하나 떨지 않고 서 있을 수 있었다.”

오늘날 윤리의식에 비추어 볼 때 문제가 많은 이 서술에서 성욕의 동학을 발견할 수 있다. 성욕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한교수는 당시의 성 모럴에서는 권장되지 않았을 혼전 성행위를 거듭 행하고, 그 결과 정순에 대한 정념과 욕망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손가락 하나 떨지 않고 배표를 쥐고 서 있는 한교수는 성욕을 원 없이 해소한 수컷의 요상하게 초월적인(?) 자태이다.



이 논리를 ‘님의 침묵’ 해석에 적용해보자. 정순처럼 늘 조국이 자신의 곁에 함께 했을 때는 애국심이라는 욕망이 약하기 마련이다. 늘 공무원이 어른거리고, 세금까지 걷어간다면, 조국이 지겨워질 수도 있다. 즉 조국이 건재할 때 애국의 욕망은 약하다. 그렇다면 애국의 욕망은 언제 가장 강한가. 마찬가지로 논리로, 조국이 멀쩡하지 않을 때, 혹은 갓 멸망했을 때 가장 강하다. 성욕을 해소할 대상이 사라져버렸을 때 성욕이 가장 강하듯, 애국의 욕망을 해소할 대상이 망해버렸을 때 애국의 욕망이 가장 강하다.

1920년대. 한국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된 상태이다. 그렇다고 그저 슬픔에 허우적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을 통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새 희망”으로 만들자고 제안한다. 욕망의 동학을 고려한다면, 님이 떠나버리고 침묵하는 이 망국의 상황이야말로 애국의 욕망을 불태울 수 있는 최적의 상황인 셈이다. 즉, ‘님의 침묵’의 메시지는 님이 부재(침묵)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님이 부재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망국은 애국의 최적의 조건이니, 좌절하지 말고 애국의 욕망을 불태우라.

이리하여 독자는 왕조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혹은 멸망으로 인해, 불멸하는 형이상학적 조국을 상상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그 형이상학적 존재는 1945년에 현실의 몸을 얻게 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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