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금 정점을 찍었다 아베는 마지막 애를 쓸 뿐

입력
2020.06.25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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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일본의 모습은 영화 속 괴물 ‘고질라’와 닮아 있다. 고질라가 일본 열도를 무참히 파괴하듯, 일본인들은 특유의 자기 파멸 본성을 발휘하며 스스로를 파국으로 몰아넣고 있다.”

천황제 등 일본의 금기를 들추며 일본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해온 일본의 대표적 지성인 우치다 다쓰루(70)와 ‘영속패전론’을 발표하며 젊은 논객으로 떠오른 시라이 사토시(43). 두 사람은 2015년 출간된 대담집 ‘사쿠라 진다’에서 일본의 파괴적 몰락을 예고한 바 있다. 보통 사람들은 문제가 발생하면 조금씩이라도 개선해나가기 위해 애를 쓰는 게 상식. 하지만 일본인들은 전부 다 갈아 엎고 처음부터 시작하는 길을 선호한다. 언뜻 듣기엔 급진적이지만 과정은 지리멸렬하다. 시스템이 온전히 무너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고만 있는 탓이다.  

5년이 흐른 지금, 두 사람의 진단은 유효할까. 최근 번역 출간된 ‘피크 재팬 : 마지막 정점을 찍은 일본’ 역시 톤은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일본은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서 구조적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하지만 변화를 위한 개혁의 노력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은 지금 마지막 정점을 찍었다.” 저자는 아베 정권이 일본 국력 부활의 신호탄이라 고대하는 도쿄 올림픽에 대해서도 “피크재팬에 대한 작별을 고하는 무대”가 될 것이라며 찬물을 끼얹는다.  



아베 정권의 독주가 장기화하면서 일본의 추락을 전망하는 책들은 국내에 많이 소개돼 왔다. 다만 이 책은 미국에서 손꼽히는 동아시아 국제전략분석가인 저자가 제3자의 시선으로 써내려갔다는 점에서 보다 객관적이다. 특히 저자가 30년 동안 일본에 살며 만났던 일본 정치인부터 관료, 학자, 기업인, 평범한 시민들의 내적인 사고 방식까지 들여다볼 수 있어 설득력을 더한다. 작년에 쓰여진 책이라 비교적 최신의 일본 사회상을 담아냈다.

세계 일류국가를 자부하던 일본은 왜 이렇게 무기력해졌나. 저자는 ‘잃어버린 10년’ 이후 일본이 맞닥뜨린 정치 경제 외교안보 사회에서 뽑아낸 4가지 사건을 축으로 일본 내부의 고질적 문제를 파헤친다. 이 강력한 쇼크들은 일본 사회에 경고음을 세게 울렸지만 일본은 귀담아 듣지 않았고 결국 개혁할 타이밍마저 놓쳤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21세기 들어 일본은 여러 차례 굴욕을 겪는다. 일류국가였던 과거의 영광만 부여잡고 있었던 터라 충격파는 더 컸다. 2008년 일본 경제도 피해갈 수 없었던 리먼 쇼크. 일본 경제의 성공요인이었던 국가 주도의 경제시스템은 더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 경제를 망치는 실패 요인으로 전락했지만, 일본은 변화를 모색하지 않았다. 성공의 기억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리라. 외교 안보에서도 일본은 더 이상 아시아의 리더나 맏형의 위치를 점할 수 없게 됐지만, 여직 가장 센 줄로 착각하다 망신을 산다.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분쟁은 거대한 힘의 이동을 일깨워주는 사례였다. 일본의 정치 경제 사회 난맥상을 발가벗겨 놓은 '인재'였던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사건은 일본인들에게 극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저자는 이 모든 문제를 야기한 구조적 원인으로 일본 정치의 후진성을 꼽는다. 자민당 일당 독주였던 일본에서 2009년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는 커다란 변혁의 계기였다. 하지만 야당 생활이 너무 오래됐던 탓일까. 민주당은 변화를 열망하는 일본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수권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3년 만에 허무하게 퇴장해 버렸다.

물론 민주당만 몰아세울 순 없다. 저자는 민주당의 실패로 드러난 일본 정치 구조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짚어낸다. “일본 정치는 ‘가라오케 민주주의’에 속박돼 있다. 정치인은 가라오케에서 노래 부르듯 반주에 따라 가사를 읽기만 하면 된다. 시스템은 누가 지휘하건 간에 시스템 자체의 존속만을 보장했다.” 정치학자 이노구치 다카시의 말이다. 저자는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료들에 기댄 채 “가장 쉬운 일은 기다리는 법”이라며 상대 진영의 헛발질만 기대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무능력을 비판한다.



근본적으론 이런 별볼일 없는 정치인들을  뽑는 일본 시민들의 낮은 안목이 문제다. 저자는 사회 구조적 한계보다 일본 시민들의 패배주의 태도와 체념의 정서가 일본의 개혁을 발목 잡는 더 큰 걸림돌이라 지적한다. 일본 유권자들은 영웅적 정치인을 기대하면서도 새로운 변화를 압박할 생각도, 의지도 없다. “간바루(힘내다, 버티다)”를 외치며 인내하고 순종하는 집단주의 사고도 문제다. “일본인은 잃을 것이 너무 많고, 서서히 침식되고 있다는 생각에 점차 물들어가면서도 큰 변화에서 오는 불확실성보다는 오늘날 누리고 있는 안락함을 선호한다.” 일본 젊은이들은 강대국이 될 생각도 없고, 현실에 만족하며 행복해 한다. 

하지만 야망의 화신 아베는 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위기 극복을 위해 택한 전략은 과거의 영광을 부활시키기 위한 ‘직진 본능’이다. 저자는 이 같은 방식은 실패할거라 전망한다. 그러면서 대(對) 아시아 관계의 변화를 통한 새로운 비전을 찾는 게 지금 일본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 조언한다. 메이지시대의 유산인 ‘탈아론’에서 벗어나 아시아로 복귀하는 것만이 일본이 살 길이라는 거다. 아시아 지역은 이제 일본이 이끌어가야 하는 국가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평등한 질서, 진정한 파트너십을 맺어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한국과 중국과의 새로운 관계 구축이 긴요하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태도 변화는 필수다. 


저자는 일본이 내리막길을 걷는 게 반드시 나쁘다고만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일본이 예전만 못하다고 해서 아예 무시할 위치에 있는 국가로 몰락하는 건 아니라고도 선을 그었다. 다만 팽창과 성장 대신, 수축과 쇠퇴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있다는 거다. 아베 정권은 그 마지막 구간에서 애를 쓰고 있는거다. "다시 탄생하기엔 너무 비대해졌고, 개혁하기에는 너무도 성공적이었던 나라"가 새로운 시대 변화에 맞춰 과거의 국가 전략을 변화시켜 나갈지를 들여다보며 예습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도 유용하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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