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자가 가상 인물… ‘성락원’ 명승 지정 해제

입력
2020.06.24 22:16
새 역사적 근거 파악돼 ‘서울 성북동 별서’로 재지정 예고

명승 제35호인 서울 성북동 전통 정원 ‘성락원’이 명승 지위를 잃었다. 12년 전 지정 당시 정부가 언급한 소유자가 가상 인물이라는 사실이 확인돼서다. 부실 고증이었던 셈이다. 다만 아예 탈락되지는 않을 전망이다. 새 역사적 근거가 파악됐고 경관 가치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새 이름의 명승으로 다시 지정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문화재청은 24일 문화재위원회(천연기념물분과)를 열어 성락원의 명승 지정을 해제하기로 결정했다. 지정 명칭과 사유 등에서 오류가 일부 인정되는 만큼 사회적 논란을 불식할 필요가 있다는 게 문화재청 판단이다.

문화재청 조사 결과 당초 조성자로 알려진 ‘조선 철종 대 이조판서 심상응’은 실존한 인물이 아니었다. 문화재청은 2008년 성락원을 명승으로 지정할 당시 “전통 별서 정원 중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이라며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 심상응의 별장이었고, 의친왕 이강이 별궁으로 사용했다”고 설명했었다.

그러나 새 조성자가 등장했다. 고종 당시 내관이자 문관인 황윤명이다. 근거는 황윤명의 둘째 손자 안호영이 황윤명의 시문을 모아 발간한 유고문집 ‘춘파유고’(春坡遺稿)다. 이곳에 수록된 시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가 성락원 영벽지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1887∼1888년에 정선군수를 지낸 오횡묵이 자기가 관리로 있던 곳의 현황 등을 일기ㆍ시문 형식으로 남긴 ‘총쇄록’(叢瑣錄)에서도 황윤명이 조성한 별서 정원을 1887년 방문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문화재청 조사에서는 갑신정변(1884년) 당시 명성황후가 황윤명의 별서를 피란처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확인됐다. 명성황후가 갑신정변 이후 피란에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직접 써 나눠준 글 ‘일편단충’(一片丹忠)에 내관 김규복이 붙인 발문(發文)에는 ‘혜화문으로 나가 성북동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거나 ‘태후, 왕비, 세자께서 이미 어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경관적ㆍ학술적 가치도 인정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이 공간은 황윤명이 별서로 조성하기 이전에도 경승지로 널리 이용됐고, 다양한 전통 정원 요소들이 주변 환경과 잘 조화돼 있다. 현재 얼마 남지 않은 조선 시대 민가 정원으로서의 학술적 가치도 크다.

이에 문화재청은 이곳의 명칭을 ‘서울 성북동 별서’로 바꿔 명승으로 재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로 했다. 관련 사항은 30일 동안 관보에 예고된 뒤 각계 의견 수렴을 거쳐 최종 심의ㆍ확정된다.

현재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지정된 명승은 성락원을 제외하고 모두 114건이다. 이 중 해남 대둔산 일원 등 2건이 관계 법령 재정비 과정에서 명승에서 해제됐다 다시 번호를 부여 받았다. ‘서울 성북동 별서’가 재지정되면 명승 117호가 된다.

권경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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