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도생이 왜 나쁜데... 색안경을 벗어라

입력
2020.06.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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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인구변화와 각자도생의 패러다임

편집자주

※우리 사회의 출생아 수 감소와 고령자 수 증가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인구쇼크’가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미래가 예상되고 대응 전략은 무엇인지, 경제학자이자 인구 전문가의 눈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전영수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 단위로 토요일 연재합니다.



일상의 소중함이 새삼스런 하루하루다. 세상이 달라졌다는 현실인식은 길어질 듯하다. 초연결사회에 작디작은 균의 조용한 습격이 던진 놀라운 교훈이다. 인간의 탐욕이 생태계의 조정기제를 불러왔다는 평가에 숙연해진다. 좋게 보면 숨고르기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볼 수도 있다. ‘많이, 크게, 빨리’의 욕구 본능을 멈추고, 달라진 시대 상황에 맞는 새로운 변화 체제가 절실하다. 전쟁에 버금가는 전시 사태니 일단은 무차별적인 대응이 필요하겠지만, 한편에선 새로운 시대에 어울릴 만한 물밑 과제를 성실히 살펴야 할 때다. 대표적인 것이 인구변화발(發) 개혁 이슈다. 몸은 변했는데 옷이 그대로면 ‘미스 매칭’이듯 인구변화가 내놓은 새 삶을 못 받아들이면 엇박자만 낼 것이 자명해서다. 바이러스 충격의 확산이 경제 기반을 붕괴시키듯 인구변화는 사회 전반에 상당한 변화와 파장을 수반할 것이다. 기존모델은 먹혀 들지 않는, 달라진 ‘뉴노멀 경제학’의 탄생이다.

◇ 인구변화·축소경제가 낳은 각자도생

코로나19와 인구변화. 사실 둘은 꽤 닮았다. 방치하면 상당한 파장을 동반할 대형 악재라는 점은 물론이고, 불거진 후 맞서본들 잃을 게 많다는 공통점도 있다. 일찍이 위험 경고가 있었단 점도 비슷하다. 특히 상식으로 통해온 거시경제와 생활 무대의 실현 방식에 변화를 압박한다는 게 닮았다. 이른바 ‘축소경제’의 출현이 그렇다.

코로나19가 순식간에 벌어진 돌발적인 충격이라면 인구변화는 장기간 이어진  만성적인 증상이라는 차이는 있다. 사실  인구문제는 만성 증상이이라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합계출산율 0.92명(2019년)이라는 인류 역사상 신기록은 한국 사회에 더는 시간이 없음을 웅변하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위기를 체감하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선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다. 스스로 활로를 꾀할 수 밖에 없는, 숱한 보통사람의 공통 분모라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청년은 출산을, 중년은 희생을, 노년은 은퇴를 거부하는 발상의 전환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축소경제는 각자도생을 낳는다. 각자도생은 또 인구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돈벌이의 고단함이 저출산과 고령화를 고착화하는 구조다. 가족부양이 힘드니 덜 낳고, 장수 위기가 커지니 더 버는 각자도생이 거세진다는 얘기다.  정부라도 엉킨 실타래를 풀어주면 좋겠지만, 재정부담이라는 난제가 도사리고 있다.  

결국 각자도생은 ‘저성장+재정난+인구병’의 악순환적인 상관 관계와 맞물린다. 문제는 앞으로다.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가족구성 자체가  ‘고위험ㆍ저수익’인 만큼  인구감소는 당연한 추세로 굳어질 것이다. 1인당 4만 달러의 국내총생산(GDP)를 봐도 추가성장은 힘들다. 미래 희망보단 현실 행복이 우선되는 이유다.

◇ 건강한 개인의 자구적 선택모델에 주목

각자도생은 어느 순간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키워드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직장인들은 '올해의  사자성어' 1위로 각자도생을 골랐다. 아무도 안 도와줄뿐더러 누구도 못 믿는 한국 사회의 실존형 생존비법인 셈이다. 싫든 좋든 살아내자면 의존에서 자립으로 바뀔 수밖에 없는 시대 변화를 상징한다.

그만큼 한국사회는 요동치고 있다.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밀려드는데, 속도는 빠르고 범위는 넓다. 용케 비켜설 수 있는 행운(?)도 오래가기는 힘들다. 시간 문제일 뿐 절대 다수는 불행한 파고에 휩싸일 수 밖에 없다. 불안 사회를 넘어 위기 사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다. '안전지대'가 줄어든 것은 사회 곳곳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어 직장 공간은 위험 천지다. 어제의 동료가 떠밀리듯 물러난다. 낙타구멍을 뚫어 입사를 했더라도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는 것이다.  사회도 그렇다. 배려나 양보는 사라진 지 오래고,  기성세대의 생존원칙은 악다구니로 정리된다. 더 빨리, 더 많이 챙기려 운동장을 기울인다.

때문에 각자도생은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행위로 폄하되기도 한다.  공동체의 질서와 화합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선 경계 대상이자 파기 항목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수긍할 대목은 있다. 정부 복지가 충분히 구축되지 않은 조건에선 집단의 상생과 부조, 공익이 강조되는 건 충분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물밑에선 허황된 슬로건이란 의심이 많은 게 현실이다.  말로는 상호 협력을 외치나 몸으론 각자도생을 챙기는 숱한 사례 탓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당사자일수록 묘하게도 각자도생이 먼저다.  장삼이사(張三李四)에게도 각자도생보다 선의와 인내적인 협조와 포기를 요구하지만, 동의하기 힘든 이유다. 나를 포기하고 남을 배려하자는 도덕률은 예전엔 맞았어도 지금은 틀리다.

이제 각자도생의 색안경은 벗겨져야 한다. 공조상생의 지향은 맞지만, ‘개인희생→사회후생’의 방법론은 재조정이 시급하다. ‘개인행복→사회행복’으로 우선 순위를 바꾸는 게 현실적이다. 불행한 분자가 행복한 전체와 무관한 반면 튼튼한 개인이 굳건한 사회를 만든다. 이때 선택된 인생 경로가 사실상의 각자도생이면 나쁠 건 없다. 본능적 경제구조는 각자도생으로 재편된 지 오래다. 하물며 개인에게만 공동체를 선순위로 두라는 메시지는 가혹하고 매몰차다. 되레 건강한 개별 행복의 추구는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카드에 가깝다.

물론 과도한 행복추구는 사회비용을 유발한다. 서로 믿고 돕는 그나마 신뢰자본을 깨트릴 수 있다. 그럼에도 중요한 건 개인이 없으면 사회도 없다는 사실이다. 시나브로 각자도생은 한국사회를 지배할 유력한 새로운 경제학에 이름을 올렸다.

◇ 가족변화에서 확인되는 뉴노멀의 최일선

가족 모델은 각자도생을 만나 새로운 생존 유형으로 진화한다. ‘각자’ 시작해 ‘도생’을 꿈꾸는 가족재구성은 다양하고 세분화된다.  각자 잘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족을 지켜내는 이타성의 실현인 까닭이다. 아쉽게도 가족은 행복의 원천이자 불행의 단초를 공유하는 이율배반적인 공동체다. 삶이 힘든 거의 모든 이유는 가족과 중첩된다. 해서 도미노처럼 전체 가족을 옥죄고 괴롭힌다. 가족도 ‘남’일 수밖에 없는데 ‘나’로 접근하니 갈등과 대결이 증폭된다. 과도하게 덧대진 책임과 의무의 가족제도가 만든 주술적인 허상일 뿐이다. 이제 믿어왔던 정상가족은 변화 압박에 섰다. 이들은 생경할지 모르나 새롭게 발견된 행복 지향의 지름길로 각자도생을 따른다.

가족은 변한다. 시대변화에 맞춰 최적화된 진화 모델을 지향한다. 게임룰의 변화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인 적자생존적인 가족재구성이다. 실험 범위는 넓다. 구조와 기능 등 전통가족이 표준 모델로 채택해온 가족시스템 전반을 아우른다. 2차 가족으로의 분화미션을 부여받은 미혼남녀는 선배 경로를 거부한다. 결혼과 출산의 연기와 포기를 필두로 도미노처럼 붕괴될 가족 불행의 존재 자체를 봉쇄한다. 취업 악화 등 금전적인 한계와 자기다움의 인생가치를 가성비로 따진 결과다. ‘귀찮은 가족’보단 ‘외로운 혼자’의 부각이다. 타인과의 동맹가족인 ‘한지붕 여러가족(쉐어하우스)’이 대안 주거로 떠오르는 이유다. 부모 설득에도 적극적이다. 내 인생 스스로 살아갈테니 은퇴 봉양의 짐은 알아서 챙겨라 협의한다. 묵묵히 스스로 살아내는 이들의 각자도생을 왜곡해선 곤란하다.

중년의 각자도생도 활발하다. 불황 압력이 본격화된 외환위기 이후 사회에 진입한 신세대가 이제 40~50대에 들어선 게 컸다. 혼자 살아도 괜찮다는 평생 비혼을 주도한 이들이 나이를 먹자 ‘총각아저씨ㆍ처녀아줌마'로 남는다. 신중년에게 거리낌이 없는 자기다움을 찾으려는 이혼과 재혼 모델도 관심사다. 당당해진 새로운 가족실험의 현장이다. 노년자립과 관련된 가족재구성의 실험도 잦아진다. 기생자녀의 무한지원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인연을 찾거나 스스로의 가치실현을 위한 변신시도가 그렇다. 역시 지향은 각자도생인데, 근거(近居)형 대가족처럼 가족효용과 본인생활을 구분해 판단한다. 최소한 가족에게 짐을 주지 않고자 전통적 노후봉양은 기대조차 않는다. 결국 각자도생은 신시대의 뉴노멀에 가깝다. 부작용을 줄여야지 대놓고 비난해선 곤란하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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