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 가까이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여러 직군의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바다를 무대로 생업을 이어가는 선원들도 그 중 하나다. 최근 부산에서 러시아 선원들의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했지만, 책임을 전부 이들에게 물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다. 이동제한 명령으로 장기간 바다에 발이 묶인 선원들은 지금 밀집된 공간에서 정신적ㆍ육체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런 화물선 선원들이 무려 20만명을 헤아린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렵다”는 이들의 외침을 외면하다간 해운 공급망 붕괴와 물류대란과 같은 더 큰 위기를 초래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제운수노동조합연맹(ITF)은 22일(현지시간) 작심한 듯한 성명을 내놨다. “피로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선원들을 방치하면 사고로 이어지기 쉽고, 결국 열심히 임무 중인 동료들의 명예가 손상된다. 선원들이 집으로 돌아가 휴식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그러면서 “전 세계가 해상 운송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을 잘 알지만 선원들이 그 부담을 무한정 감당할 수는 없다”며 각국에 적극적 지원을 촉구했다.
ITF의 일성은 괜한 투정이 아니다. 미국 CNN방송에 따르면 바이러스 확산을 우려한 각국이 항구를 폐쇄하고, 여객기 운항 중단으로 교대인력 수급마저 막히면서 현재 20만명에 이르는 선원들이 선상에 고립돼 있다. 해사노동협약상 선내 체류기간은 최대 11개월. 하지만 감염병 사태 탓에 1년이 넘도록 계약을 연장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43년 경력의 한 화물선 선장은 방송에 “미국에서 하선을 거부당해 계약기간을 두 달 미뤄야 했다”면서 “운 좋게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거쳐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중국이나 베트남, 필리핀 선원들은 귀국할 길이 없다”고 말했다.
인권은 당연히 후순위가 될 수밖에 없다. 각국 정부가 하선과 정박을 금지시켜 잠시도 땅을 밟기 어려운 처지인데다, 협소한 공간에 오래 머물러 감염병 확산에도 다른 직군보다 훨씬 취약하다. 심지어 환자가 나와도 의료지원을 거부당하는 일까지 속출하고 있다. ITF는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감에 일부 선원들은 극단적 선택까지 하고 있다”며 “이들에게 배는 ‘떠다니는 감옥’이나 다름 없다”고 전했다.
더 큰 문제는 선원들의 인권 침해가 개인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모든 나라가 경제활동 재개를 서두르면서 ‘해운 발(發) 시한폭탄’을 경고한다. 국제무역에서 해상 운송이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자료를 보면 세계 물동량의 약 80%가 컨테이너선과 유조선, 건조 벌크선 등을 포함한 선박을 통해 거래되고 있다. 코로나19 국면에서 해상교통의 중요성은 훨씬 도드라졌다. 화물선들은 전 세계로 필수 의약품과 보호장비, 식료품을 실어 나르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이런 커다란 운송 수단을 움직이는 선원들의 열악한 환경을 이대로 놔뒀다간 말 그대로 글로벌 무역망이 ‘올 스톱’되는 상황이 닥칠 수도 있는 셈이다.
가능성도 충분하다. ITF에는 요즘 분노한 선원들의 항의전화와 메시지가 하루 수백 통씩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파업 등 단체행동 움직임까지 거론되고 있다. 가이 플래튼 국제해운회의소(ICS) 사무국장은 “문제가 길어질수록 해운 공급망은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해운업계는 각국 정부에 선원 150만명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안전지대’ 설치를 요구하고 있다. 선원들을 ‘핵심 근로자’로 지정해 승ㆍ하선 시 제한 없이 이동을 허용하고, 공항에도 안전한 환승구역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플래튼 사무국장은 “대책은 우리가 모두 만들어 놨다”면서 “정부의 정치적 결단만 남았다”고 수용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