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혼, 기억상실증, 동성애 ... 그러나 막장 아닌 웰메이드 가족 드라마

입력
2020.06.2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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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평받는 tvN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어떤 과학자가 그랬어. 우리는 지구 내부 물질보다 태양계 내부 물질을 더 많이 안다고. 지구에 살고 있는데 지구 내부는 알아서 뭐하냐 이런 거지. 가족이 딱 그래.”

은희(한예리)는 친구의 사소한 버릇과 취향은 알아도 정작 가족에 대해선 잘 모른다 자책한다. 그러자 찬혁(김지석)은 베스트셀러 ‘거의 모든 것의 역사’의 저자 빌 브라이슨이 썼던 내용을 읊어준다.

지난 2일 시작한 tvN 드라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 제작진의 기획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가장 친밀하다는 가족이, 과연 그럴까.

‘가족입니다’는 서로에게 무심하게 살아가던 한 가족이 뒷목 잡고 쓰러질 만한 사건을 잇달아 겪으면서 서로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드라마다.


졸혼, 기억상실증 그리고 동성애

 

첫 번째 사건은 엄마 이진숙(원미경)의 졸혼 선언이다. 퉁명스러운 걸 넘어 가시 돋친 말만 골라 하고 버럭 화만 내는 남편 김상식(정진영)과 더 이상은 못 살겠단다. 엄마의 깜짝 선언에 술렁이던 3남매는 야간산행에 나섰던 아버지가 실종됐다는 소식에 혼비백산한다.  

상식은 다행스럽게 인근 병원에서 발견되지만 뇌에 입은 부상으로 부분 기억상실증에 걸린 상태. 며칠 전만 해도 아내의 심장을 후벼 파던 그는 22살 청년으로 변해 진숙을 ‘숙이씨’라 부르며 수줍게 웃는다.

가족 내 사건사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막내 지우(신재하)는 첫째 누나 은주(추자현)가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는 걸 알게 된다. 여기에 또 하나. 남편과 오랫동안 냉랭한 관계를 이어오면서도 아이를 갖기 위해 애써온 은주는 남편 태형(김태훈)이 동성애자였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소재는 막장, 그러나 다른 선택

기억상실증, 출생과 성정체성의 비밀 등 소재만 보면 영락 없는 막장드라마다. 매회 사건이 터지고 깜짝 놀랄 만한 비밀이 드러나 일부 시청자들 사이에선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 빗대  ‘가족의 세계’로까지 불린다. 그렇다면 이제 얼굴에 김치를 포기째 집어 던지거나, 폭언을 퍼부으며 드잡이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데 이 드라마는 그런 과장된 연출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가족입니다’는 타인보다 더 타인 같은 가족이 오해와 갈등을 계기로 충돌하는게 아니라,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자극적 소재와 반전이 수시로 등장하지만 '말초적 자극' 보다는 '가족 간 소통부재'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사용한다. 

그래서 소재는 막장에 가까워도, 이 모든 사건이 어느 가정에라도 있을 법한 일처럼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미 우린 둘 다 저세상 사람이요"라는 진숙의 대사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언어 폭력을 꼬집고, 은주와 은희 자매의 대립은 자신의 상처만 내세우는 가족 내 이기주의를 보여주기도 한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여타 가족 드라마와 비슷한 소재를 다룬다 해도 ‘가족입니다’는 풀어나가는 방식이 다르다”며 “극적인 장치들도 가족들이 서로에 대해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쓰고 있다”고 말했다. 




가족에 대한 성찰 끌어낸 수작

아무래도 작가의 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드라마는  영화 ‘접속’ ‘텔미썸딩’ ‘후아유’ 등의 시나리오를 썼던 김은정 작가가 썼다.  권영일 감독도 제작발표회에서 “불편할 정도로 현실적이지만, 그로 인해 더 공감하고 반성도 하며 교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촘촘하면서도 추진력 있는 스토리, 강약 조절에 능한 연출, 주연급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조화를 이루며 드라마에 대한 반응도 좋다. 시청률은 3~4%대지만 시청자들 사이에선 '웰메이드 드라마'로 꼽힌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진행되는 다른 가족드라마와 달리, 이 작품은 가족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내고 있다”며 “가족에 대한 성찰, 나아가선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수작”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공희정 평론가도 “단순히 혈육이라고 해서 가족이 아니라 어떻게 소통해야 가족이라 할 수 있는가 묻는 드라마라는 점이 대단히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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