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초 만난 호순이는 참혹했다. 동물단체에서 구조된 호순이는 마당에서 살면서 동네를 자유롭게 드나들던 고양이였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호순이는 온몸에 화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만큼 새까맣게 탔고 네 발바닥은 불에 타서 다 벗겨져 있었다.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다보니 잡아 들고 악의적으로 불을 붙인 것이다. 나는 8년 전 만난 고양이 '요미'를 떠올렸다. 길고양이였던 요미 역시 불에 탄 채 발견되었고, 치료기간만 1년 반이 걸렸다. 귀 연골이 타버려 요미에겐 귀가 없다. 털이 나지 않아 자주 상처가 나서 얇은 옷을 입고 산다. 둘 다 사람을 여전히 좋아한다. 당시 칼럼에 "길고양이들아 제발 사나워져라"라 쓴 게 기억난다.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길고양이 학대는 여전하다. 아니 더 잔혹해졌다. 왜 그럴까. 길에 다니는 주인 없는 동물 중 대다수가 고양이라 눈에 잘 띄고 만만해서 화풀이 대상이 되기 쉽다. 길고양이를 학대해도 처벌의 강도가 너무 약하다. 책임지고 보호해주는 이가 없으니 쉽게 폭력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길고양이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가장 큰 이유다.
얼마전 동묘시장에서 고양이를 쫓아내려 목을 매달아 끌고 다닌 사건이 그런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단순히 내쫓으려고만 한 목적이었다면 위협해서 내보냈으면 그만이었다. 무서워서라고는 하지만 굳이 줄로 매달아 끌어낼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상자에 담은채 밟을 이유도 없었다. 거슬리니까 ‘치워버리자’라는 의도가 더 컸다고 보인다. 행여 고양이가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고려는 없었다. 길고양이를 잡는 건 '덩치 큰 해충'을 잡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인식 때문에, 동묘시장의 해당 상인도 주위 상인도 왜 '학대행위'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이땅에 사는 길고양이가 겪는 일반적인 상황이다.
길고양이에 대한 정서는 온도 차가 크다. 고양이를 챙겨주는 이들이 많이 늘어난 만큼, 거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많다. 싫어하는 것을 탓하자는게 아니다. 문제는 싫다고해서 함부로 할 수 있는건 아니라는 점이다. 거슬리는 존재니까 해쳐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은 잔혹한 고양이 범죄를 묵인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인간을 해치는 범죄를 양산하는 결과가 될수도 있다.
길고양이는 '동네고양이'다. 있으면 안 되는 곳에 불법 거주하는 동물이 아니다. 오랜시간 동네에서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은 해로운 동물이 아니다. 우리 동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없어진다면 무시무시한 일들이 벌어진다. 중세에도 그랬다. 마녀사냥으로 고양이들까지 싸잡아 죽인뒤 페스트가 시작됐다. 십여 년 전 서울의 몇몇 지역에서 동네에 사는 고양이를 일괄적으로 잡아서 없앴다가 그 동네만 팔뚝만 한 쥐가 창궐했었다.
길고양이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은 크게 3가지다. 배설물, 발정기나 영역 다툼으로 인한 소음, 음식물쓰레기봉투를 찢는 문제다. 그런데 이런 불편은 상당부분 해결이 가능하다. TNR를 통한 중성화 수술로 고양이끼리의 소음을 줄이고 개체수도 조절된다. 일정한 자리에 규칙적으로 밥을 주면 고양이들은 음식쓰레기 봉투를 훼손하지 않는다. 배고프지 않으면 음식에 집적대지 않는게 고양이의 특성이다. 또, 배설물문제도 해결가능하다. 고양이는 자신의 활동 영역을 정확히 구분한다. 밥을 먹는 공간과 용변을 보는 공간을 분리해서 사용한다. 자신의 앞마당이나 텃밭이 화장실로 이용된다면 차라리 그곳에 밥을 주는 것을 추천한다.
엄연히 동물보호법의 보호를 받고 있는 길고양이들이 더는 무참히 학대받는 일이 없도록 국가에서 제도적으로 이미지 개선과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길고양이가 '동네고양이'라는 인식의 개선은 제도적인 교육과 설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공포물이나 괴담에 나오는 고양이도 갑자기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먼저 해를 끼친건 인간이다. 인간이 해를 끼쳤다고 어디 감히 고양이 따위가라는 식의 인식은 너무 오만하다. 이젠 인간이 공손하고 착해질 때다. 인간들아 공손해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