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6ㆍ25속 여성...죽음보다 무거웠던 그들의 삶

입력
2020.06.2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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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에 홀로 선 소녀는 한복 자락을 나부끼며, 품 한가득 꽃다발을 끌어안았다. 마주 보이는 군함엔 나라를 대신 지켜줄 타국 군인들이 타고 있다. 배가 다가올수록 가냘퍼지는 소녀의 뒷모습에서 스스로를 온전히 지킬 수 없었던 조국의 비탄이 느껴진다. 시대의 격랑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휩쓸렸던 나라의 운명과 전쟁 속 여성의 운명은 꼭 닮았다. 

우리가 알고, 기억하는 전쟁엔 여성이 없다. 피가 튀고 살이 터지는 전장의 주역은 언제나 남성들로 기록됐고, 여성은 '만들어진 이미지'로 남았다. 순수하고  고결한 소녀, 참전한 영국 군함을 환영하는 소녀 또한 이 같은 '선전물'의 일부였다.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선 필사적으로 전쟁을 치러야 했던 '진짜 여자'들이 있었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가로지르던, 마침내 폐허가 된 도시에서 억척스럽게 새 터전을 일궈내던, 여자들이 있었다. 죽음보다 더 지난하고 무거운 그들의 ‘삶’이 거기 있었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은 6ㆍ25 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당시 여성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 자료들을 찾아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으로부터 수집한 수만여 건의 사료 중 일부로,  미군이 촬영한 것들이다.  ‘전쟁 속 여성’들에 대한 기억을 빛바랜 사진을 통해 복원했다.

목숨을 건 고난의 피난길

전쟁이 터지자 너나할 것 없이  피난길에 올랐다. 장성한 남자들은 징집을 피해 먼저 떠났기 때문에, 어린 자식과 늙은 부모를 챙기는 일은 오롯이 어머니와 딸의 몫이었다. 갓난아기를 둘러업은 채 한 손으로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죽음의 전장을 가로질렀다.  






“할머니고 처녀고 없어, 여자면 다 겁탈하는 거야. 길거리 가다가 아무나 끌고 가서 겁탈을 했어.” (전쟁피해 여성 한모(90)씨의 증언, <딸들의 한국전쟁>(2007, 안태윤) 中)

당시 여성들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건, ‘성폭행’의 공포였다. 피난길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몸뻬 바지를 입히고 어린 동생을 등에 업혀 ‘기혼 여성’처럼 보이게 했다. 머리를 짧게 잘라 남장을 시키거나, 오줌에 숯을 섞어 얼굴을 검게 칠하기도 했다. 하지만 성폭행은 도처에서 일어났고 ‘재수가 없으면 누구든 당할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을 잃고도 삶은 계속됐다

6.25 전쟁  중 남편을 여읜 ‘미망인’은 무려 50만명에 달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40년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결혼한 여성들은 서른 안팎의 나이에 몇 년 함께 살아보지도 못한 남편을 잃고 만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슬픔을 제대로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아이들은 종일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을 쳤고 어머니들은 이 집 저 집의 뒤주와 장독대를 비웠다. 그조차 여의치 않을 땐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다가 죽을 쑤어 먹였다. 열 살을 갓 넘긴 딸들은 걸음마도 못 뗀 동생을 등에 업고 어머니를 도왔다.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였지만, 전쟁은 딸들을 너무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다.





강해야만 했던 당신, '어머니'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단어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못한 아내’라는 뜻의 이 단어는 전후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는 비딱한 혐오의 시선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소설가 정비석은 그의 작품 <유혹의 강>에서 “미망인은 누구나 점유할 수 있는 무주공산적 존재”라고 일컬으며 노골적인 멸시를 드러냈고 언론 매체들은 “현모양처라는 가치관이 파괴돼 여성들이 향락과 허영에 빠지게 됐다”며 개탄했다.

시장으로 나선 여자들

남쪽으로 떠났던 피난민들이 하나둘씩 귀환하면서 폐허로 변한 서울도 조금씩 활기가 돌았다. 고향도 남편도 잃은 여자들에게 이곳은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대개가 충분한 배움이 허락되지 않은 이들이었기에, 유일한 생계유지 수단은 ‘파는 것’뿐이었다. 광주리 행상에서부터 노점까지 시장에 자리를 잡은 상인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전쟁에서 입은 부상으로 밥벌이에 나설 수 없는 남편을 대신해 시장에 자리를 튼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밑천을 조금이라도 마련할 수 있는 이들은 시장 좌판으로 나섰고, 그마저도 없으면 식모살이를 전전하다 매춘으로까지 내몰린 경우도 적지 않았다.


 

매일 새벽 십 리를 걸어 시장으로 나간 어머니들은 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와 쓰러져 잠들었다. 그렇게 근근히 번 돈으로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전쟁통, 여성들의 밥벌이는 유난히 가혹하고 팍팍했다. 

40~50대 어머니들이 시장에 나가는 동안,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딸들은 전시 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향했다.  일사불란하게 기계를 돌리는 소녀들의 앳된 얼굴에서도 삶의 고단함이 진하게 배어난다.



“다소의 지식기술 또는 지조가 있는 여성은 취업전선으로, 그렇지 못한 여자는 남의 첩으로, 또 이도저도 될 여력이 없는 여자는 ‘살아야 한다’는 엄숙한 사실 앞에 드디어 윤락의 길을 택하였다” (동아일보, 1955년 12월 12일)


'제 5의 보급품' 성매매 여성 

6ㆍ25전쟁 당시 국군은   ‘특수위안대’를 조직해 병사들의 ‘성적 위안’을 꾀했다. 군부대 안에 댄스홀과 위안소를 설치했고, 성매매 여성들로 하여금 미군 간부들을  겨냥한 외화벌이에 나서게 하기도 했다. 공식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위안소는 1950년 8월 초 경남 마산에 설치된 ‘연합군위안소’다.


 당시 한미 정부는 이 같은 방안이 '양국의 우호관계를 진전시키고 남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미군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외교) 수단’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방식의 군 사기 진작 전략은 일본군 출신이 대다수인 군 지휘부가 과거에 습득한 경험을 답습한 결과였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들을 ‘제5 보급품’이라고 불렀다.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

장장 70년, 6ㆍ25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긴 시간 이어지고 있는 전쟁이다. 빛바랜 사진 속에서 여성들은 온몸으로 말한다. 죽지 못해 필사적으로 살아내야 했던 전쟁 속에서 자신들이야말로 진짜 '당사자'였다고. 그들은 어미이자 가장, 생계부양자였고, 그 이전에 피와 땀, 눈물, 뜨거운 체온을 가진 ‘인간’이었다.

“저도 이제는 강해졌습니다. 옛날에 당신이 알던 가냘프기만 한 그런 여자는 아닙니다. 밟혀도 밟혀도 고개 쳐드는 민들레같이 몇 번인가 쓰러질 듯 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이렇게 싸워 나오고 보니, 이제야 삶에 대한 자신과 힘을 얻은 것 같습니다.”  (1955년, 한 전쟁 미망인의 구술 中)







박지윤 기자
김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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