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의 위기, 다툼이 있는 경우 판례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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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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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국가기관이 주관하는 시험 출제위원으로 합숙을 들어갔다. 출제위원들이 문제를 내면 함께 합숙 중인 공무원들도 문제에 오류가 있는지 꼼꼼히 검토한다. 그런데 어떤 문제의 지문 내용에 관하여 법원의 판례가 없다는 이유로 출제하기에 부적합한 문제라고 이의를 제기하였다. 다시 검토한 후 오답 시비에 휘말릴 염려도 없는 것이니 그대로 하라고 했다. 그럼에도 그는 판례가 있는 지문으로 변경을 해달라고 요구하면서 물러서지를 않았다. 판례가 없을지라도 법리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여 관철시키는 데 매우 힘들었다. 

국가시험은 치열한 경쟁으로 한 문제를 맞고 틀림에 따라서 당락이 결정된다. 그래서 정답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여러 시험에서 정답을 둘러싸고 재판까지 이어졌고, 오답으로 판정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시험 주관 부처는 오답 시비가 없는 문제 출제에 큰 관심을 갖는다. 그 결과 법원의 판례를 묻는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다. 판례는 어떤 사건의 법적 판단에 관한 것이라서 구체적 사실관계를 알아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객관식 시험에서는 ‘판결 요지’를 아는지 묻게 되고, 그 판례가 나온 배경이나 중요도 등에 관한 깊이 있는 내용은 다루기 어렵다. 판결 요지 중에서 일부의 문장을 달리 표현하는 방법으로 출제를 하면, 오답 시비도 없고 출제하기도 쉽다. 

그래서 변호사시험을 비롯한 각종 공무원시험 문제 다음에 “다툼이 있는 경우 판례에 의함”이라는 문구가 있다. 예컨대 올해 시행된 변호사시험 헌법 11번 문제는 “국회의원에 관한 설명 중 옳은 것은? (다툼이 있는 경우 판례에 의함)”이렇게 되어 있다. 국회의원에 관한 설명 중 법원의 판례에 따라 정답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금년도 변시 기출문제인 공법 40문제, 민사법 70문제 중에서 단 1문제를 제외한 나머지 설문 모두에 “다툼이 있는 경우 판례에 의함”이라고 되어 있다. 형사법은 40문제 중 38문제에 저런 표기가 있다. 거의 모든 문제가 판례 지식만을 측정한다. 

법학 과목을 시험과목으로 정한 것은 법의 정신·기본이론과 법령 및 그 해석과 판례에 관한 지식을 검증하려는 데 있다. 그 결과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자는 법치행정을 할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가질 수 있다. 특히 로스쿨은 복잡다기한 법적 분쟁을 전문적으로 해결할 지식과 능력을 가진 법조인을 양성하려고 도입되었는데, 장차 판검사, 변호사가 되는 시험에서 검색하면 금방 알 수 있는 판례의 암기능력만 검증하는 것이 유능한 법조인 양성에 맞는지 의문이다. 

대학에서 방대한 저서를 출간하고 연구논문을 내는 교수들도 출제위원이 되면, 판례 문제만 내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오답이 없도록 출제해 달라는 출제기관의 요청에 협조해 준 결과라고 선해하고 싶지만, 지나치게 편파적이다. 법학 문제에서 옳고 그름에 관한 다툼이 있을 때, 일반 법리를 적용하도록 하는 것도 창의적·균형적인 지식 측정에 유익하다고 본다. 시험의 출제 경향은 학교 교육과 학습 방향을 결정하기에 중요하다. 로스쿨은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려고 판례 중심의 교육을 한다. 학생들도 교과서를 꼼꼼히 읽기보다 판례 암송에 주력한다. 

최근 로스쿨 협의회는 민사, 형사법 표준 판례 1,373개를 선정했다. 로스쿨에서 표준판례를 기초로 공부시키고, 판례가 다루는 법리를 출제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수험생에게 출제 대상 판례를 특정해 준 것이라서, 판례 의존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로스쿨 도입과 실무교육으로 법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이런 제도의 변경 때문이 아니라, 교수들 스스로 법학을 죽이고 있는 형국이다. “다툼이 있는 경우 판례에 의함” 이 말은 법학의 사망 선언과 다름없어 보인다. 수험생은 법원에 재판을 청구한 사건 당사자가 아니다.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ㆍ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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