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부터 80년간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 입구를 지켜온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의 동상이 철거된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불붙은 반(反) 인종차별 여론이 식민주의 시대 극복을 요구하는 ‘역사 청산’ 운동으로 확대되면서다. 심지어 주(州)의회 차원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꼽히는 토머스 제퍼슨 전 대통령의 동상도 없애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문제의 동상은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원주민 남성 한 명과 아프리카계 흑인 남성 한명을 거느린 채 말 위에 올라 탄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엘런 퍼터 뉴욕 자연사박물관장은 21일(현지시간) 일간 뉴욕타임스에 “인종차별 반대 움직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루스벨트 동상은 구조적 인종주의의 강력한 상징”이라고 말했다. 이어 “박물관 측은 루스벨트의 ‘개척자’ 면모를 계속 존경하지만 조각상 자체에는 문제가 있어 치울 때가 됐다”고 철거를 적극 두둔했다.
루스벨트의 후손들도 철거 여론에 힘을 보탰다. 증손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 4세는 “동상은 증조부의 유산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며 “세계는 정의와 평등, 타인의 가치를 손상시키는 조형물을 필요로 하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도 이날 발표한 성명에서 “루스벨트의 조형물이 흑인과 미 원주민들이 예속된 존재들이며 인종적으로 열등하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그리고 있는 까닭에 자연사박물관이 철거를 요구했고, 시도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잦아들고 있지만 역사 청산 목소리는 되레 커지는 분위기다. 뉴욕시 의회는 앞서 18일 청사 안에 진열된 제퍼슨 전 대통령의 동상 철거를 시 당국에 요청했다. 데비 로즈 의원은 “제퍼슨은 미국 독립선언문을 저술하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됐다고 말했지만 정작 자신은 흑인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믿었다”며 “시의회는 우리 역사의 어두운 면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동상 역시 해체 여론에 직면했고, 필립 톰슨 뉴욕 부시장 등은 ‘스톤웰 잭슨 웨이’ 등의 도로명이 흑인 노예를 찬성했던 남부연합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며 개칭을 요구하기도 했다. 14일에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설치된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의 동상에 “노예 소유자”라는 스프레이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에도 역사적 인물의 동상 철거와 관련한 불편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 “어이가 없다. 하지 마라!”라는 글을 올렸다. 그는 전날 오클라호마주(州) 털사에서 열린 대선 유세에서도 “좌파 무리가 우리 역사를 파괴하고 아름다운 기념물들을 훼손하려고 한다”고 맹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