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작품상도 예견… ‘촉’의 배우 송강호

입력
2020.06.19 04:30
<7> 송강호

※ 영화도 사람의 일입니다. 참여한 감독, 배우, 제작자들의 성격이 반영됩니다. <영화로운 사람>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가 만나 본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의 삶의 자세, 성격, 인간관계 등을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의 면면을 되돌아봅니다.


“봉준호 감독은 왜 안 오는 걸까.” 지난 2월 9일 오후 (현지시간)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공식 기자실. 한국 기자들은 시상식 초반부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수상자들은 상을 받는 순서대로 기자실에 들러 기자회견을 한 후 시상식장으로 돌아갔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남우조연상을 받으며 시상식의 테이프를 끊은 배우 브래드 피트가 먼저 기자실에 등장했고, 이후 장편애니메이션상과 단편애니메이션 수상자들이 기자실을 들렀다. 네 번째 방문할 이는 각본상 수상자. 영화 ‘기생충’의 봉 감독과 한진원 작가였다.

한국 기자들은 긴장하며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네 번째로 기자실에 등장한 인물은 ‘조조 래빗’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었다. 각색상을 받은 다섯 번째 수상자였다. 행사를 하다 보면 착오로 앞뒤 순서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봉 감독은 이후 쭉 기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후에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느낌이 예사롭지 않았다. 큰 사건의 전조 같았다. 넘기 힘든 1인치 자막의 장벽이 무너질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기생충’은 결국 감독상과 작품상까지 품으며 세계 영화 역사를 새로 썼다. 봉 감독은 작품상을 받은 후에야 기자실에 모습을 보였다. 그날의 주인공을 막판까지 아껴두고 싶었던 아카데미상의 속내가 엿보였다. “오스카야, 너도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쳤다.

시상식장에서도 일찌감치 아카데미의 계획을 눈치 챈 ‘기생충’ 관계자가 있었다. 배우 송강호였다. 그는 시상식 중간에 동료 관계자에게 “우리가 작품상을 받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유를 물으니 “봉 감독이 다른 수상자보다 더 빨리 자리로 돌아온다”고 나름 근거를 제시했다. 일상에서 작은 차이를 발견해 내고, 커다란 결과를 예측해내는 송강호의 동물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명문 극단 차이무에서 연기력을 다진 송강호는 1996년 ‘우물에 빠진 돼지’로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사실상의 데뷔작은 ‘초록물고기’(1997)였다. 외모와 말투와 몸짓이 진짜 깡패 같아서 촬영 중 주변 불량배를 출연 섭외한 거 아니냐는 억측이 나올 정도로 연기가 빼어났다. 이후 20년 넘게 충무로 정상을 지켜왔다. 주연으로 빚어낸 1,000만 영화만 4편(‘괴물’과 ‘변호인’, ‘택시운전사’, ‘기생충’)이다. 2010년대 초반 ‘푸른소금’(20110과 ‘하울링’(2012)이 흥행에 실패하고, 완성도면에서 박한 평가를 받으면서 한때 ‘송강호 위기론’이 나왔다. 10년 넘게 충무로를 호령했으니 기울 때가 됐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섣부른 예단이었다. 송강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관객몰이를 했고, 영화들은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기생충’은 한국 영화 최초로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최고상)을 받더니 오스카 무대까지 점령했다. 단지 연기를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영화 ‘관상’(2013)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관상쟁이 내경은 원래 다른 배우가 맡기로 돼 있었다. 뒤늦게 시나리오를 읽은 송강호가 내경 역에 내정된 배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이 정말 해보고 싶은 역할이란 말을 하며 결국 양보를 받아냈다. “송강호가 과연 사극에 어울리겠냐”(‘관상’은 첫 사극 출연이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관상’은 관객 913만명을 모았다. 송강호는 사극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고, 이후 ‘사도’(2015)와 ‘나랏말싸미’(2019)에 출연할 수 있었다. 어떤 시나리오가 완성도 높은 흥행작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에 대한 감지력, 일명 ‘촉’이 남다르게 발달한 셈이다. 여기에 자신이 관심을 두게 된 작품에 대한 집념과 연기력이 더해지면서 그는 성공가도를 달려올 수 있었던 듯하다.

10년 전쯤 인터뷰를 하며 송강호에게 연기 잘하는 비결을 물었다. “그냥 그 사람(배역)이 되면 된다”는 게 그의 답이었다. 대가의 비법을 알아낸 듯해 고개를 연신 끄덕였지만, 뒤돌아서 생각하니 기만 당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연기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는 거다. 배우는 그 살아보지 않은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이들이다. 송강호는 그저 배우의 과업을 비결이라고 말했던 셈이다. 한참을 지난 후 어느 자리에서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를 봤을 때 그의 말뜻을 문득 깨달았다. 그는 그 사람이 되기로 마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되는, 본능과도 같은 연기 감각을 지닌 타고난 배우일 수 있다고.

송강호는 최근 신연식 감독의 신작 ‘거미집’에 출연할 것이라고 밝혔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 스타 감독들과 주로 호흡을 맞춰온 그의 이력을 감안하면 신 감독과의 협업은 좀 낯설다. 신 감독은 ‘페어 러브’(2009), ‘프랑스 여자처럼’(2015) 등 주로 중저예산 영화를 만들어왔다. 떠들썩한 상업영화를 만들지도, 이렇다 할 흥행 성적을 올린 적도 없지만 오래 전부터 충무로의 숨은 재능으로 꼽혀왔다. 어느 배우들보다 예민한 그의 ‘촉’이 이번에도 제대로 작동한 것일까. 송강호의 연기는 매번 경이롭지만, 그의 출연작 선택 역시 흥미롭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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